외할머니와의 마지막 작별인사
“딸~ 많이 바쁘지~? 할머니가 많이 아프시다는디~ 병원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네~ 아무래도 오래 못 사실 것 같다야~ 한번 내려와 봐야할것 같은디, 시간 낼수 있것냐~”
엄마로부터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올해로 94세가 되시는 외할머니가 많이 편찮으셔서 마음의 준비를 해야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가족 모임 때마다 점점 쇠약해 지는게 눈에 띄기는 했지만, 항상 정정했던 그녀였기 때문에 신변정리를 해야할 만큼 상태가 나빠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한 해를 마감하느라 회사 업무가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연말 시기라 시간을 내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외할머니와의 마지막 인사 기회를 놓친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몇 주 뒤 나는 그녀를 만나러 전라도 광주에 내려갔다.
원래 외할머니의 집은 전라도 무안군 몽탄면 내에 있지만, 최근 몸이 쇠약해진 것은 물론 치매 증상까지 겹쳐져 혼자 생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결국 광주의 넷째 이모네 집으로 요양 차 모신 상태였고, 서울에 사는 첫째 이모가 내려와 함께 외할머니를 돌보고 있었다.
나의 외할머니인 그녀는 1928년 일제강점기(1910~1945)에 태어났고, 17세의 어린 나이에 조혼을 했다. 그 시절에는 결혼을 하지 않은 젊은 여성들이 일본의 공장이나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로 끌려가는 경우가 흔했다. 전쟁 중이었으니 여기저기 젊은 인력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녀 말로는 주변 동무들은 해외 공장에서 큰 돈을 벌게 해준다는 일본인들 말에 속아 여럿이 고향을 떠났는데, 결국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많다고 했다. 특히 집안이 어려운 동무들의 경우 가난을 이겨보고자 많이들 떠났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중 일부는 위안부가 되었을 것 같다며 마음 아파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 사실을 소문을 들어 알았는지 딸을 조혼 시켜 그런 변을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어린 소녀인 그녀에게는 이런 시대적인 상황보다 정든 고향과 부모님을 떠나야 하는게 더욱 가혹하게 느껴졌다.
결혼을 하기 싫어 도망갔다가 매를 여러 번 맞았다고 했다. 차라리 동무들과 함께 해외 공장을 가겠다며 떼를 쓰기도 했다. 그 때는 한참 철이 없어서 그랬다 했다. 하지만 지금 시대로 보자면 고작 고등학교 1학년 정도 되는 소녀가 약 100리 떨어진 곳으로 멀리 떠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따뜻한 고향과 동무들, 부모님을 떠나 시어르신들이 첩첩이 있는 시댁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어린 소녀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고향을 떠나 낯선 무안 몽탄면 사천리 사내마을의 새댁이 되었다. 그녀가 어려서 살던 동네 이름은 무안군 운남면의 월악마을이었다. 그런데 월악이 발음하기 어려워 사람들은 그녀를 ‘월암댁’으로 불렀다. 17살 월암댁은 부모님이 그립고 시댁살이가 서러워 아침마다 밥을 짓는 부뚜막에 앉아 서글픈 노래를 부르며 울었다.
그녀는 20세를 조금 넘어 첫째 딸을 낳은 뒤, 약 20여년간 8남매를 낳으며 대가족을 거느린 엄마가 되었다. 그녀의 첫째딸이 낳은 아들, 즉 첫 외손자와 그녀의 막내아들이 네 살 차이밖에 나지 않으니 그녀는 거의 가임기의 대부분을 아이를 낳고 키우는데 보낸 셈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방학 때마다 그녀의 집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도시에서 바쁘게 사는 엄마아빠를 대신해 방학 때마다 그녀가 나를 돌봐준 것이었다. 나 뿐만이 아니었다. 방학 때만 되면 대도시 여기저기에 사는 손자손녀들이 모여들어 그녀의 집은 보육원을 방불케 했다. 그녀의 집 근처에는 영산강과 아름다운 저수지가 있고, 그 저수지 밑으로는 깨끗하고 얕은 개울이 있었다. 그 물길을 따라 물오리와 참개구리, 잠자리, 송사리, 민물새우 등이 살았다. 겨울에는 눈이 참 많이 왔다. 어린 초등학생들이 방학을 보내기에 이보다 더 안성 맞춤인 곳은 없었다.
그녀는 매 끼니마다 맛난 반찬과 요리를 해 주었다. 먹성 좋은 우리를 위해 그녀는 마당에 사는 닭을 종종 잡아야 했는데, 그녀의 닭 잡는 솜씨는 수준급이었다. 무심한듯 마당을 가로질러 가다 순식간에 맹수처럼 도망가는 닭들을 한 구석으로 내몬다. 그 중 어리버리 붙잡힌 닭 한 마리의 양 날개 죽지를 왼손으로 단단히 여며잡는다. 그 다음 오른손으로 닭 모가지를 순식간에 비틀어 죽이는 그녀를 우리를 넋이 나간 듯 무서워하면서도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다.
닭이 불쌍하다며 그녀를 타박하면서도 그녀가 만들어 주는 닭백숙을 우리는 누구보다 맛나게 먹었다. 그녀의 살뜰한 보살핌 덕에 우리는 무럭무럭 자랐다. 나의 방학 중 외갓집 행은 한참 공부로 바쁜 고등학생 때를 제외하고는 대학생 시절 까지 계속되었다. 한 번은 그녀의 집에 대학 친구들과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다. 너무 수가 많아 그녀의 집에 모두 묵을 수 없는 상황임에도 그녀는 두 팔 벌려 우리를 환영해주고 마을회관까지 빌려 숙식을 제공해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민폐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녀가 너무 기뻐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녀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았다.
그랬던 그녀가 건강 악화와 치매 증상이 심해져 결국 요양원에 가게 되었다.
처음에 그녀의 자녀들은 모두 그녀를 요양원에 보내는 것에 반대했다. 자식이 8명이나 있는데, 그녀 하나를 돌보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자유롭게 면회도 안 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요양원에 보내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생긴 몇 개의 사건들로 인해 가족들은 생각을 바꿔야 했다.
한 번은 그녀가 밤중에 일어나 갑자기 욕을 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런 개 호로잡X들~ 어디 에미가 두 눈뜨고 멀쩡히 있는데! 뒤졌다고 부고를 돌린다냐!!! 이 씨X놈들의 새끼들~”
“아이고~ 뭔소리요~ 누가 죽었다고 부고를 돌린당가~ 아니여~ 누가 그런 소리를 하것소~ ”
“이 호로잡X들이!!! 두 아들놈의 새끼들이 그랬당께… 이새끼들이~ !!! 아이고~~아이고~~ 내가 얼른 뒤져야지..이런 욕을 안 보제~ 아이고오~~~ ”
생전 하지 않는 심한 욕을 하며 밤새 소리를 질러 대는 바람에 그녀를 돌보던 딸들 뿐 아니라 그 집에 함께 살고 있던 다른 가족들까지 밤새 잠을 설친 일이 벌어졌다. 정작 본인은 그 다음날 그런 일이 있었는지 조차 기억을 못하고 말이다. 비슷한 사건이 그 뒤로도 몇 차례 반복되었다.
또 한 번은 그녀가 갑자기 집안에서 사라진 사건이 일어났다. 그녀가 지내는 집은 2층 큰 저택이어서, 1층에는 그녀의 넷째 딸 내외와 그녀가 함께 살고2층에는 그녀의 8번째 손자 내외가 두 아이를 낳고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그녀가 1층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온 집안이 발칵 뒤집어 졌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2층 거실 공간의 소파 한 귀퉁이 에서 편하게 잠을 자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하지만 제대로 거동하지 못하는 그녀가 가파른 내부 계단을 올라 2층까지 어떻게 갔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엄마~ 근디 어떻게 높은 그 2층을 혼자 올라갔소~?”
“아따.. 구름같은 엘리베이터가 포근~하게 나를 싸서 올려줬당께… 엘레베터 타고 편하게 올라왔다마다~ “
그녀의 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치매 증상이 심해져 간병을 하는 가족들이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도 큰 문제지만, 잠깐 소홀한 사이 그녀가 집을 나가 어딘가로 사라져버린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2021년 12월 6일 그녀는 요양원에 입소하게 되었다.
나는 그녀가 요양원으로 떠나기 전날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녀는 그날 따라 유난히 정신이 또렷했다. 마흔 명이 넘는 손자와 증손자들이 있음에도 나의 아이들 이름과 남편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여 부르며 반가워했다. 날마다 우리 이름을 놓고 기도 하고 있다는 말도 했다. 이런 그녀가 치매라니!믿어지지 않았다. 언제나 우리의 든든한 우산이 되어줄 것만 같았던 강하고 유쾌했던 그녀가 뼈만 남아 쇠약해진 모습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요양원에 가는걸 거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녀들과 이별하는 상황 때문에 하루 종일 슬퍼했다.
“내가 너~무 오래 산게 죄여..죄다.. 내가 얼른 죽어야 하는디~ 너무 오래 살아서 느그들 고생시킨다~ 미안허다… 어~어~엉~”
“엄마~ 뭔소리요… 엄마가 이래 살아 계시니 우리가 얼마나 마음이 좋소..그런 말 하지 마소~ 그만 울으랑께~ 눈밑이 다 헐것소~ ”
그녀와 남은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고, 지난 추억도 나누고 싶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와서 인사를 하는 상황이라 그럴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너무 슬펐다.
“그녀에게 아직 궁금한 것들이 너무 많은데~ 그녀에게 듣고 싶은 옛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받은 사랑에 내가 얼마나 감사했고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야기 하고 싶은데~”
그녀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또한 그녀의 남은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그녀로부터 받은 따뜻한 사랑과 헌신은 내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다. 또한 그녀와 함께 했던 아름다운 추억들은 그녀의 자녀와 손자손녀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그녀가 날마다 새벽에 교회에 가서 올린 기도는 우리의 삶 구석구석을 빛과 같은 축복으로 비추고 있다.
그녀와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녀와 같은 따뜻함을 줬던 적이 있었던가 ?
나는 마지막 작별의 순간을 누구와 함께 하게 될까 ?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
그녀를 보면서 언젠가 나에게도 이런 마지막 작별의 순간이 오겠구나 라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막연하게 느껴지는 생의 마지막 순간은 현실이 될 것이다. 어렸을 때는 끝이 있다는 것을 생각만해도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누구에게나 다가올 현실임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비록 짧지만, 그녀의 시간이 행복하고 즐거웠으면 좋겠다. 과거를 생각하며 괴로워하고, 미래를 걱정하며 한탄스럽게 시간을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속절없이 시간이 지나 벌써 2022년 구정 명절이 왔다. 그녀가 너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