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코로나 19는 전 세계인의 삶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강력한 위협 앞에 가장 먼저 내몰린 것은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급, 인종의 사람들이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도시의 경제적 기반이 서비스업으로 대체되면서 노동의 공간적 분업은 더욱 심해졌고, 고임금, 양질의 일자리는 특정 계급 혹은 지위의 사람들에 의해 독점되었다. 이로 인한 극심한 양극화와 산업 다양성의 부재는 도시의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오랜 시간 동안 지목되어 왔다. 어쩌면 코로나 19는 단순히 문제 해결을 위해 행동할 시간을 조금 앞당겼을 뿐이다. 이 유례없는 위기를 많은 사람들이 ‘기회’라고 부르는 이유다.
로컬-리콜 오프닝 행사 현장
지난 6월 18일 ‘로컬-리콜’ 온라인 시리즈 오프닝 행사에서는 팬데믹 상황이 서울, 뉴욕, 브뤼셀 도시 제조업에 미친 영향과 위기 상황을 기회로 바꾼 도심 제조업의 사례들이 공유됐다. ‘로컬-리콜’ 은 지난해부터 탈성장시대에 도시의 미래 생존전략으로서 도심 제조업에 대해 논의해 온 서울시립대 베타시티센터가 도심 제조업이 직면한 위기와 과제를 ‘로컬(지역)’의 관점에서 재조명하기 위해 기획한 온라인 시리즈다. 총 10회의 강연 및 포럼을 통해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가 직면한 변화와 위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지역적 극복 방안에 대해 논의한다. 여기서는 지난 오프닝 행사에서 나누어진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전염병의 충격, 가속화된 존재의 위협
산업시대 도시 성장의 원동력이었던 ‘도심 제조업’은 세계화, 후기 산업사회에 생산체계가 변화하면서 ‘쇠퇴와 낙후’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제조업 친화적이지 않은 도시개발 정책과, 사무실, 문화 쇼핑 시설 위주의 사업을 진행하는 개발사, 이러한 개발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임대료와 임금 등으로 인해 도심 제조업의 존재는 오랫동안 위협받아왔다. 규모의 축소, 소수 공정에 특화된 형태로의 전환, 이웃한 소규모 사업장과의 협업이 변화하는 도시의 상황에 조응하여, 도심 제조업이 선택한 생존 전략이었다.
그러나 팬데믹으로 인한 사상 초유의 경제위기는 소규모 공장들의 취약한 기반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특히 재정 및 위기대응 역량의 취약함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Made in NYC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는 조아나 레이놀즈는 코로나 19로 인한 셧 다운 충격으로 뉴욕의 수많은 제조업체들이 심각한 금전적 위협에 처했다고 전했다. Made in NYC팀은 이들을 적절한 정부지원과 연결해주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디지털 마케팅 등 핵심적인 스킬을 온라인 워크숍을 통해 교육했다.
살아남은 제조업과 위협받은 제조업 (출처: Adrian Vickery Hill)
시티즈 오브 메이킹 프로젝트 코디네이터인 애드리언 비커리 힐 역시 성장궤도에 올랐던 브뤼셀의 맥주공장들이 타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는 또 위기 속에서 어떤 업종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도 내놓았다. 생산품이 생활에 필수적인 재화일수록, 로컬 네트워크와 연관이 깊을수록 타격이 적었던 반면 첨단기술 제품이나, 글로벌 네트워크와 연관이 깊은 업종은 고배를 마셔야 했다. 예를 들어, 버섯재배, 자전거 생산은 타격이 적었던 반면 관광산업과 연계된 맥주 양조장이나,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를 적극 이용하는 자동차 산업들은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다.
생존 위기 앞에 빛난 도심 제조업의 잠재 역량
생존의 위기 앞에 영세한 규모, 취약함이라는 도심 제조업의 약점은 ‘유연한 변화’라는 강점으로 치환되었다. 기존 제작 방식을 조금 변화시키는 것만으로 이들은 코로나 19 상황에 필수적인 물자들을 생산해 낼 수 있었다. 팬데믹 상황에서 서울, 뉴욕, 브뤼셀 세 도시에서 공통적으로 긴급한 생산이 요구되었던 물자는 단연 마스크였다.
서울의 경우 창신동 의류공장에서 필터 교체가 가능한 안심 마스크가 생산되었고, 세운 일대의 종이 박스 제조시설에서는 종이 마스크가 생산되었다. 뉴욕에서는 브롱스에 위치한 소파 제조업체는 단기간에 지역 병원에 공급할 수 있도록 의료기준에 맞춘 마스크를 생산해냈다. 브뤼셀의 섬유제조공장에서도 기존 생산설비를 통해 마스크 및 가운 등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장애인을 고용한 사회적 기업과의 협업, 지역 의상실의 마스크 생산 등으로 코로나 시대에 필수적인 마스크의 지역 내 조달이 가능하게 했다. 마스크의 생산은 지역사회에 필요한 물량을 공급했다는 점뿐 아니라, 도심의 공장들이 재정적 위기를 극복하고 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로컬 네트워크 역시 위기 극복에 큰 역할을 했다. 앞서 언급했던 위기에 처한 브뤼셀의 맥주 공장들은 배달 시스템과 연계하여 지역에 음식과 맥주를 판매하며 어느 정도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로컬 맥주 소비 장려 효과도 얻었다. Made in NYC의 경우 마스크, 손 소독제 등 주요 물자를 생산 가능한 공장과 이를 필요로 하는 지역에 관한 자료를 한 데 모아 데이터베이스화 했다. 안면보호구를 만들어내는 3D 프린팅 업체, 손소독제를 만드는 위스키 공장 등을 Made in NYC 홈페이지를 통해 검색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를 통해 로컬 네트워크 안에서 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생산과 소비가 연결될 수 있었다.
계속되는 도심 제조업의 축출
한국의 김용범 기획재정부 차관을 포함 각국의 언론과 정치인들은 이와 같이 신속한 도심 제조업의 대처를 칭찬했다. 그러나 이미 진행 중이던 도심 제조업의 축출을 막는 데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개발과 재생이 혼재된 도시계획은 일견 도심 제조업을 보호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여겨지지만, 제도 변경의 시차 속에서 도심 제조업은 빠르게 파괴되고 있다.
프랫 커뮤니티 디벨롭먼트의 센터장인 아담 프리드먼은 뉴욕시의 토지 용도 정책은 제조업에 반하는 사무실(office) 친화적 정책 기조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한 예로 뉴욕시는 많은 소규모 제조업과 공급자들이 디자이너들과 일하고 있는 Garment Centre를 오피스 개발로 쓰려고 조닝하고 있었고, 디자이너들은 그들의 사업의 경쟁력을 유지하게 해주는 생산 네트워크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다. 심지어 견고한 공업지대인 브루클린 북부에서는 제조업 보호 및 강화를 위한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시정부에 토지용도 정책은 그대로였기 때문에 어떤 새로운 보호 효과도 얻을 수 없었다. 아담은 “코로나 19 상황에서 Garment Centre의 공장들은 마스크와 보호 가운 공급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며 “만약 공장들이 더 사라져 버린 2년 뒤에 팬데믹이 일어났다면 지금과 같이 대처할 수 있었을지 장담할 수 없다.”라고 경고했다.
일관되지 않은 도시정부의 정책으로 인해 오랜 시간 축적된 생산 네트워크가 파괴되고 있는 것은 서울에 위치한 소규모 제조업 밀집지역 세운 일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약 8천 개의 소규모 공장들이 밀집한 이 지역은 40여 년간 유연한 다품종 소량생산에 최적화된 독보적인 협력 네트워크를 형성해왔다. 하지만 7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도심 제조업 지역을 이전하고 재개발하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2014년 ‘다시 세운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도심 제조업이 비로소 수용되기 시작했으며, 도심 제조업 보존을 위한 시민단체들의 노력과 여러 공개 담화들이 이어지며 작년 3월에는 시정부가 공지된 재개발 계획의 전면 재검토를 공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인가된 지역에서는 개발공사가 멈춰지지 않았으며, 많은 제조업체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고, 결과적으로 장기간 형성된 협력 네트워크는 파괴될 위기해 처했다.
세운: 축적된 협력 네트워크 기반한 도심 제조업의 매력적 허브
MIT 도시계획학과 박사과정의 안채원 연구원은 이 날 2019년 진행된 세운 일대 산업 특성 조사의 결과를 공유하며 이 지역의 생산 네트워크가 가지는 가치에 대해 이야기했다. 조사는 제조업, 인쇄업, 도소매업, ICT 디자인 등 신규업종 4가지 분야에 대해 전반적인 현황 및 상호협력관계를 파악하는 질문들로 진행되었다.
세운 일대 산업 특성 조사 보고서 연구결과 (출처: 안채원)
연구결과 매우 높은 비율이 사업체들이 수주, 하청, 유통으로 세운 일대라는 ‘하이퍼로컬’ 안에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특히 인쇄업종의 경우 세운 일대 안에서의 협력관계가 더욱 긴밀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약 40%가 세운 일대에서 일을 수주받고 80% 이상의 업체가 세운 일대 안에서의 하청을 통해 생산을 수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 17%의 도소매업 사업체만이 세운 일대 제조업체들과 연관되지 않았다고 답했으며, 제조업체의 부품을 공급하거나 이웃 업체를 통해 보수, 수립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생산공정의 전후 과정에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 도소매업종은 이 일대에 최근 유입된 신규업종들과 함께 로컬 네트워크에서 생산된 제품을 광역적으로 유통하는 매개 역할을 담당했다.
이처럼 긴밀한 협력 네트워크는 ‘생산 지식의 집약’이라는 세운 일대 고유의 자산을 만들어냈다. 재개발의 위협이 아니라면 대부분 10년 이상 이곳에서 일을 지속하고 싶다고 응답한 기저에도 대체 불가능한 자산으로서 협력 네트워크가 자리하고 있었다. 집약된 생산 지식은 신규 창업자들에게도 굉장히 매력적인 자산인데, 아이디어를 현실화할 수 있는 현장의 지식을 세운 일대에 입주함으로써 손쉽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시 세운 사업을 통해 입주한 신규사업자들은 기존 제조업체들과 공동 디자인, 프로토타이핑, 공동 기술개발 등 활발한 협력을 통해 성과를 창출해내고 있다. 이상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안채원 연구원은 “도심 제조업을 보호하는 것은 단순히 전통 제조업을 보존하는 것을 너머 미래의 혁신을 확보하는 것”이라는 당부의 말을 전했다.
나가며...
코로나 바이러스의 충격은 더 이상 어디서 생산되었는지도 모를 제품을 ‘소비’하는 공간만으로 채워진 도시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예측되지 않은 위협으로부터 회복탄력성을 담지한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생산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세 도시 모두에서 도심 제조업은 취약한 경제기반과 작은 규모로 인해 존재의 위협을 받았지만, 유연함이라는 강점을 발휘하여 로컬 커뮤니티에 기여하는 동시에 생존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의 크리스티안은 “취약함을 줄이고 유연성을 발전시키는 것이 도심 제조업의 미래에 중요한 도전과제”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좌: 다시세운을 만든 사람들 (출처: 다시세운을 만들다) / 우: Made in NYC 프로젝트에 참여자들 (출처: Made in NYC 홈페이지)
소규모 도심 제조업의 취약함을 보강하기 위한 주요하고도 현실적인 전략은 ‘네트워크’ 혹은 ‘공동체’이다. Made in NYC가 구축했던 데이터베이스, 브뤼셀의 맥주공장을 살린 지역의 배달 네트워크, 협력 네트워크를 통해 빠른 결과물을 산출해내는 세운 일대의 소규모 공장들이 바로 이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이는 결코 세계화된 현재를 무시한 채 지역 안에서만 자급자족을 하자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지역과 분절된 삶의 태도에서 ‘지역에 기반한 삶의 태도로의 회복’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도심 제조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