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깜박 속은 거다
그래. 깜박 속은 거다. 봄인 줄 샤랄라 블라우스를 고르고 두터운 오리털 코트를 어떻게 빨아서 어디에 구겨 넣을까 궁리했다. 따뜻한 날 만나자는 약속을 줄줄이 잡고 봄꽃 소식 따라 기차를 탈까? 바다를 건널까? 수다를 떨었다. 에취. 처음 등이 서늘해지며 첫 기침이 나올 때 알았더라면 겨울과 무 자르듯 이별할 생각을 안 했더라면 조용히 물러났을지 모를 겨울. 마당을 소용돌이치는 성난 바람이 며칠째다. 겨우내 안방 화분에선 해 시계를 따라 뾰족뾰족한 가시 위로 꽃이 피고 진다. 화분 뒤 거울 속엔 바람 없이 그냥 봄날이다. 불과 몇 년 전 봄은 이랬다. 그러나 지난봄 새로 산 구두는 한 번도 신어보지 못한 체 다시 봄을 맞고 구식이 되어간다. 믿기지 않는 일상에 지쳐있던 겨울 같은 코로나 일 년. 하지만 어느 날 말랑한 햇볕에 등짝이 따끈해지자 왈칵 위로가 쏟아진다. 속닥속닥 꿈틀대는 들판의 봄기운이 새들을 이동시키고 집 나온 개들이 꼬랑지를 쳐들고 골목 볕을 누빈다. 풀 죽은 마음을 창가로 데려가 부드러운 오일파스텔을 슥슥슥. 가장 평범한 봄날로 가장 순수하게 들어서는 중이다. (2021 년 봄이 올 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