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순간의 실존적 감각을 깨우며 걸은 적이 참 드물었다. 음악을 듣거나, 분주한 업무를 고민하거나, 가족과 함께 얘기하며 걷거나, 해맑은 딸의 호기심을 채우며 걸었지, 피부에 닿는 바람과 코에 스치는 내음, 저멀리 서있는 가로수 잎을 바라보며 걸었던 적이 있었던가. 고요히 하지만 감각되는 모든 감상들을 느끼면서, 여전히 생경히 살아있는 나를 인지한지가 언제인질 모르겠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여전히 감각하는 나는 봄을 마주한 제주 애월의 밤거리가 참으로 반가웠다. 바람이 가로수잎을 스치며 스스스 소리를 내고, 구름이 달을 가리며 흘러갈때 보였다 사라졌다하는 달빛이 마치 악보처럼 펼쳐졌다. 드르륵 닫히는 상점의 오랜 문과 띵동 울리는 편의점의 새 문도, 이른 밤에 웃으며 걷고 막차가 끊긴 버스정류장에 나란히 앉아 장난치는 청년들의 웃음도 모두 피부에 닿고 눈에 보였다. 무엇보다 아주 오랜만에 내 발이 땅에 약간 끌리며 닿는 소리를 들었다.
불꺼진 가로등이 비추는 분간하기 힘든길을 걸으며 칠흙같은 깊은 어둠이 보내준 바람은 아주 포근했다. 아.. 내가 살아있구나. 나에게 말할 수 있구나. 내가 걷고 있고, 이 작은 숨소리가 아직 있었구나. 고요함이 연주해주는 일상의 소리가 왜 그리 아름답게 보여졌는지. 어쩌면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아주 많은 이야기들이 간직하기 어려운 타인을 위한 분주함에 증발되는 것은 아닌지, 새삼 순간이 아까운 느낌이다.
잠들기 전, 다음날을 계획하며 이런 저런 일들을 머리에 그리고 상상해본다. 하지만, 마주한 오늘은 전날의 상상과는 사뭍 달라 간격을 매우느라 정신이 없다. 새롭고 낯선 순간의 길을 걸으며 들을 수 있는 시간의 연주를 놓힌채 말이다.
하늘과 저 먼곳에 담고싶은 풍경이 자리하고, 세지않은 바람이 건물사이와 도로를 흐르며, 사람들의 분주하지 않은 발걸음, 여기에 눈에 담고싶은 자연스러운 풍경이 녹아있는 그런 도시의 일부를 만들어 보고싶다. 누군가의 일상이 회복될 수 있는 그런곳 말이다.
세상에 즐겁고 재미있는 많은 일들이 있지만, 나는 충만한 사명감과 너무 아름다운 일상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오늘도 건축의 한 페이지를 열어본다. 이 따분하고 눈물나는 어려운 걸음 하나로 오늘도 눈에 보일순 없을 지언정 낯설지 않은 일상이 아주조금은 회복되어지길 바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