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 없이 오른 계단

잊힌 시간의 조각들 — 말해지지 못한 존재와 기억을 복원하는 시간

by 순간의 기록자

[메인 이미지 대체 텍스트: 낡은 목재 문이 열려 있고, 그 사이로 어두운 철제 계단이 위로 이어진다. 깨진 유리창과 벗겨진 벽지, 흐릿한 빛이 들어오는 풍경은 오래된 건물의 침묵과 시간의 흔적을 담고 있다. 계단은 기초 없이 불쑥 시작되어, 불안정하지만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암시한다. 이미지 출처: Pixabay]






나는 무엇을 배우든 ‘처음부터’ 혹은 ‘기초’, ‘뼈대’, ‘기본기’라는 단어를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책을 읽을 때도 중간부터 넘기는 법이 없고, 운동을 배워도 진도를 빼기보다는 정확한 자세를 익히는 데 더 집중한다. 일을 할 때도 놓친 것은 없는지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이런 얘길 하면 “참 피곤하게 산다.” 싶지만,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일상은 ‘좋은 게 좋은 것’ 내지는 ‘그럴 수 있어’라는 마음으로 산다. 단, 제대로 해내겠다는 마음을 먹은 일이나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주변 사람들이 ‘독하다’ 라 평할 만큼 다른 사람이 된다.


글을 쓰면서 생각해 봤다. 왜 그럴까 하고.

이건 어쩌면 내 안에 뿌리 깊이 남은 어떤 결핍의 반동 일수도 있겠다 싶었다.



형제복지원에 잡혀갔던 때는 초등학교 3학년을 막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어릴 때의 기억은, 형제복지원 안에서 가족을 생각하며 끝없이 그리움으로 되새겼던 행복했던 기억 몇 가지 빼고는 하나도 기억나는 게 없다.

희미하게 기억나는 건, 유괴되었을 당시 얇은 옷을 입고 실내화 주머니를 빙빙 돌리며 집으로 향했던 것이 전부다.


그래서 나의 어릴 적 기억은 집으로 돌아온 초등학교 5학년 때 시작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도 어릴 적 내 친구들과 함께 6학년이 되었어야 했다.



형제복지원 안에도 형식적인 교육 공간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교육’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할 정도로 거리가 멀었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관리자들은 원장이 기독교인 탓에 몽둥이와 기합으로, 믿지도 않고 의미도 모른 채 '성경 구절'과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게 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


아직도 이 앞 구절이 생각이 난다.

나는 그곳에서 초등학교 3학년부터 5학년까지의 정규 교육을 통째로 잃었다.

더 정확히는 저 알 수 없는 구절 들과 배고픔, 생존을 위한 몸부림, 이유 없는 폭력만이 기억의 전부다.



그런 아이가 집으로 돌아와 5학년으로 정규교육을 다시 시작했다.

이전에 다녔던 학교에서는 이전 생활기록부의 똘똘했던 아이의 기록을 바탕으로

내가 원하면 6학년으로 바로 진급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줬다.


부모님이 나에게 의사를 물었던 기억이 난다.


“어때, 6학년으로 갈래? 아니면 3학년부터 다시 시작할래?”


어렸지만, 그 말에 덜컥 겁이 났다.

모르긴 해도 3년 치를 건너뛰고 수업을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 또래 친구들은 6학년을 다닐 텐데, 3학년이나 4학년으로 다니는 것도 너무 부끄럽고 싫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도 모른 채, 한 단계 밖에 차이가 안 난다는 단순한 꼬맹이의 샘으로 5학년이 결정되었다.


“저.... 그럼 5학년으로 다닐게요.”


운 좋게도 겨울방학이 끝난 직후라 집 근처로 전학을 가면서 5학년 친구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었다.

겉으로는 새로운 환경에 완벽히 적응이 되는 셈이었다.


한편으로는 웃픈(웃기고도 슬픈) 에피소드도 있었다.

중2가 이 되었을 무렵, 초등학교 3학년 이전 친구들과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다. 그 친구도 나도 너무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지나가는 ‘좀 논다는’ 3학년 친구들이 시비를 거는 일이 있었다.


명찰의 색깔로 학년이 구분되었는데 말을 놓으며 대화하는 걸 듣고는 시비가 걸린 거였다. 그때 그 친구가 재빨리 나를 감싸며 상황이 정리가 되었지만, 그 사이의 공백은 감춰지지 않았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두 학년을 건너뛰고 5학년 수업을 듣게 된다.


산수(수학)는 기본적인 연산 및 개념(분수, 소수, 도형 등)을 전혀 모른 채, 수업을 들었다.

국어는 기본적인 문법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문장구조를 파악해야 했고 논리적인 글쓰기를 배웠다.

자연(과학)의 경우엔 동식물의 특징이나 기본적인 과학 원리에 대한 이해 없이, 생물의 변화, 물질의 변화 같은 심화된 개념을 배웠다.

음악은 음표, 쉼표, 박자, 음계 등 악보 보기를 모른 채, 소리만을 듣고 기억해 피리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 아이는 제대로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문득 궁금해져 요즘 모든 것을 알려준다는 AI에게 물어봤다.


“3학년과 4학년 정규교육을 못 받은 아이가 5학년 과정을 배운다면 어떤 어려움에 직면할까?”


A4용지 한 장이 넘는 문제점을 쏟아내는 답변들 속에서 한 문장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에게는 엄청난 부담과 고통이 따르고 효과적인 학습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도 국어나 다른 과목들은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는 말처럼 어떻게든 따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산수(수학)만큼은 정말 아니었다.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개념을 배우는 건, 구멍 난 물독에 의미 없이 물을 채워 넣는 기분이었다.


나중에는 당연한 수순으로 수학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공부에 흥미를 완전히 잃었다.


이런 속사정을 모르는 부모님은 이따금 나에게 어르고 달래듯 이런 말을 했다.

“우리 막둥이는 착하지 똑똑하지 다 좋은데 왜 공부를 안 하는지 모르겠네, 아빠가 공부 뒷바라지는 얼마든지 해줄 테니 제발 공부 좀 열심히 하자라고.”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과거의 획일적인 정규교육 폐해의 산 증인으로, 나는 어느덧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엄마는 우리와 이별하며 하늘로 돌아가셨고, 사춘기는 아주 극에 달해 있는 시기였다. 조용했지만 한 번씩 심사가 뒤틀리면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매사에 날을 세우고, 고슴도치처럼 털을 곤두세우던 시절.

“더러워서 피한다”라고 말하듯 주변이 하나둘씩 등을 돌릴 때도, 언제나 변함없이 내 곁을 지켜준 세 명의 친구가 있었다.


미영이, 미정이, 영미. 내 고마운 친구들.

그 친구들만은 어림없다는 듯 내게 다가와 혼도 내고, 웃기도 하며, 묵묵히 곁을 지켜줬다.


그 친구들에게 나는 고해성사하듯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친구에게 초등학교 산수를 다시 배웠다.

하지만 그건 촘촘한 학습이라기 보단 겨우 갈증을 해소하는 수준이었다.

그렇다 보니 아직도 수학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나를 움츠러들게 한다.


공부를 잘했던 3명의 친구들은 각자의 성적에 맞게 학교가 나뉘었다.

나 또한 학습 포기자의 성적으로 선생님이 안정권이라고 정해준 곳, 농업계 고등학교 전산과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첫 시험을 보고 관심 밖이던 성적표에 적힌 등수 숫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반 인원 51명 중에 12등.


‘응? 이게 뭐지?’ 싶었다.

인문계 고등학교라면 꿈도 못 꾸었을 숫자를 보면서 ‘이것 봐라’라는 마음이 생겨났다.


그 이후부터 공부에 흥미를 잃었던 나는 숫자가 주는 성취감에 눈을 떴다.

위로 향하는 등수의 그래프를 보며 공부에 흥미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첫 해 상반기를 제외하고 졸업할 때까지, 장학증서에 롯데 신격호 회장 이름이 적힌 성적 장학금을 3년 내내 받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빠마저 뇌출혈로 돌아가신 뒤였다.

50만 원씩 받던 장학금은 가장의 역할을 하던 오빠의 어깨를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한결 놓였다.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오빠에게 장학금을 건넸던 그 순간을 나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다른 것도 아닌, 공부를 포기했던 내가 성적 장학금을 건네는 그 사실 자체가 말할 수없이 자랑스러웠고, 가슴 벅차도록 뿌듯했다.


하지만 공부를 해보면서 더욱 절감했다.

기초 없이 뭔가를 쌓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정말이지, 모래 위에 성을 쌓는 느낌이었다.

그 불안정함을 지금까지도 내 안에서 완전히 밀어내진 못했다.



그래서 무얼 하든 기본·기초에 집착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운동을 할 때도 자세 하나하나를 철저히 익히고, 글을 쓸 때도 기본 12시간 가까이 작성하고, 수정하고 또 수정한다. 내가 납득할 수 있어야 비로소 마침표를 찍는다.


글을 쓰며 알게 됐다.

나는 완벽주의자가 아니라,

내가 쌓지 못한 그 빈틈으로 혹여나 일이 어그러지는 것이 두려워 재차 확인하는 거였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마다 남들보다 시간을 더 들였던 것도, 완벽하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허공 위에 쌓는 것만 같은 불안감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가라앉히고 싶은 거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서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형체를 더듬으며 한 걸음씩 내디뎠고, 그 시간은 결국 불안을 밀어냈다.

그리고 그 빈 공간은 조금씩 믿음으로 채워지고 있다.



지금은 예전처럼 나를 다그치거나 재촉하지 않는다.

완벽주의자도 아니고 은근 허당의 구석도 있다는 것도 받아들였다.

모든 것은 ‘마감’ 날짜가 완성시켜 준다는 마음으로, 그 제한된 시간에서 최선을 다해 마무리한다.


그리고 내 손을 떠나면 그 결과가 어떠하든,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믿는다.


어쩌면 나는 여전히 두려움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껏 그래왔듯 그 두려움이 나를 멈춰 세우지 못한다는 것도 내 삶의 궤적이 말해주고 있다.


그 두려움을 동력 삼아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삶을 더 굳건히 붙잡고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는 걸 이제는 아니까.



기초가 없었던 아이는 이제,

그게 무엇이든 기초를 쌓아가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AI에게 “3학년과 4학년 정규교육을 못 받은 아이가 5학년 과정을 배운다면 어떤 어려움에 직면할까?”에 대한 질문을 하면서 추가적인 질문 하나를 더 던져 봤습니다. “맨땅에 헤딩해야 했던 아이가 중등교육뿐만 아니라, 고등교육 과정까지 마쳤다면 너는 그 사람에게 어떤 얘기를 해줄래?”라고 말이죠.


AI의 대답은 '기적과 같은 여정', '강력한 내면의 힘', '누구보다 강한 회복탄력성과 독립심' 같은 단어들이 보였습니다. 숨 가쁘게 살아왔던 지난날의 발자취가 영화처럼 뇌리를 스치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와락 쏟아졌습니다. 그리곤 심리적 안정을 취하는 자세인 *나비 포옹을 하고는 그동안의 수고를 위로하듯, 제 자신을 토닥여 주었답니다.



여러분도 준비되지 않은 채 무언가를 시작해야 했던 적이 있으신가요?

그때의 나에게 지금, 어떤 말을 건네주고 싶으신가요?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 나비포옹: '나비 포옹(Butterfly Hug)'은 심리적 안정화 기법 중 하나로, 특히 트라우마, 불안,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괴로운 생각, 감정에 압도될 때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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