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시간의 조각들 — 말해지지 못한 존재와 기억을 복원하는 시간
[메인 이미지 대체 텍스트: 햇빛 아래 경사길을 내려가는 소녀, 말해지지 못한 시간을 지나 회복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떼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보면 흔히들 이렇게 말한다.
“어깨가 운동 좀 하신 것 같은데, 체대 나오셨어요?”
모임 자리에서는 으레 “술 좀 하시죠?”하고는 술병을 건네기도 한다.
또래보다 큰 키와 술도 잘 마실 것 같은 인상 때문인지, 아주 건강한 사람으로 본다.
하지만 겉모습이 아닌, 지난 삶의 궤적을 되짚으며 정말 건강했는지를 묻는 다면
나는 1초의 망설임 없이 ‘아니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럼 다시 묻는다면,
“언제가 가장 건강했나요?”라는 질문에는
0.01초의 주저함도 없이 ‘지금 이 순간’이라고 답할 것이다.
돌이켜 보는 것만으로도 순간 숨이 턱까지 차오르던 시간을 지나왔다는 안도감에 가쁘게 들이마셨던 숨이 뱉어진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정말 지독하게 아팠다.
집으로 무사히 돌아와 부모님과 함께하던 시기엔 아프지 않았다.
부모님과 이별했을 때 나는 중3, 언니는 고2, 오빠는 사회 초년생이었다.
그 고만고만한 나이에 오빠는 대학을 포기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아빠 역할을 대신했고, 언니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큰 어려움 없이 청소년기를 무난히 보낼 수 있었다.
마음과 달리, 경상도 특유의 무뚝뚝함이 배어 있어 서로 표현이 서툴렀던 우리는 서로에게 살갑게 대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곁에 있는 것만으로 서로에게 의지가 되었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대학생이 될 즈음 부산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했고, 언니는 수녀가 되어 꽃동네 수녀원으로, 오빠는 집에 남게 되면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외로운 홀로서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아등바등 고독한 버팀의 시간을 시작했다.
사회초년생 시절, 나의 힘겨웠던 자취 생활을 오빠에게 들킨 적이 있다.
막 학교를 졸업하고 어렵사리 구한 회사를 다니던 시기였다. 세상 물정 모르던 나는 “회사가 어려우니 조금만 더 견디면 된다”는
까마득한 대 선배의 친구이자 대표였던 사람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무려 9개월간 급여도 받지 못한 채 일하고 있었다.
당시 오빠 역시 부모님이 남겨주신 집을 지키느라 월급 대부분을 은행 이자로 바쳐야 할 만큼 빠듯한 상황이었다.
내 사정을 말해봤자 해결보다는 걱정만 키워지는 게 분명했기에 언제나 ‘잘 지내는 동생’으로 보이려 애썼다.
어떻게든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기에, 줄일 것도 없는 보증금을 더 줄여 더 열악한 곳으로 이사를 갔다.
이사한 곳은 오래된 기와집 건물이었고, 한쪽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미닫이문이 하나뿐인 방이었다. 비가 오면 신발이 젖을까 방 안으로 들여야 했고, 공용 화장실 사용과 휴대용 가스레인지로 식사를 해결해야 했다.
잘 지낸다는 동생의 말만 믿다 현실을 확인한 뒤, 해결해주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때의 충격 때문인지 다 지난 일임에도 지금껏 오빠의 방문은 열손가락 안에 꼽힌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힘듦을 알고 있었기에, 몇 달에 한 번씩 건네는 안부 전화엔 새어 나오는 한숨을 감추기에 바빴다.
기존에 풀지 못한 응어리들. 켜켜이 덧씌워진 삶의 모진 풍파가 가슴 깊이 고였다.
그리고 결국, 통증이 몸에서 분출되기 시작했다.
20대를 관통한 통증은 지독한 편두통이었다.
“편두통? 그거 두통약 먹으면 낫는 거 아니야?’라고 되물을 수도 있다.”
맞다. 나 또한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약을 먹어도 하루에서 길게는 5~6일간 지속되었다.
지속적인 통증에 한쪽 눈은 저절로 찡그려지고, 신경은 날카롭고 예민해졌다.
여유롭게 일상을 계획하는 건 사치였다.
머리를 부여잡다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가,
다음날 아침, 다시 시작되는 통증 속에 무겁게 하루를 시작했다.
병원을 전전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스트레스성 두통’, 혹은 ‘특이소견 없음’이라는 말 뿐이었다.
내가 찾아낸 유일한 통증 해소법은
아픈 쪽 머리를 벽에다 부딪쳐
인위적 통증으로 마비시키는 것뿐이었다.
위염과 위경련은 달고 사는 고질병이 되었고, 대상포진까지 겪으며 20대를 버텼다.
30대에 접어들며 어느 순간 편두통이 사라지자, 이번엔 온갖 디스크가 나를 괴롭혔다.
목 디스크와 허리디스크로 여러 병원을 들락날락하던 어느 날, 모니터에 적힌 글자 일부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해 안과를 찾았고, 상급 병원 진료의뢰서를 받아 뇌 MRI까지 찍게 되었다.
결과는 또다시 이상 없음.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 증상이라는 진단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고통에 짜증과 분노가 쌓여가던 어느 날, 컴퓨터 자판을 누를 때마다
감전되듯 손끝에서 어깨로 통증이 퍼졌다.
컴퓨터로 주 업무를 하는 내게 이 통증은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직원을 부품으로 여기는 회사였지만 성과를 인정받고 있었기에 ‘예외적 승인’이라는 말과 함께 3개월의 특별 휴직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통증은 나아지지 않았고,
사직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
통증의 원인을 찾기 위해
1년간 여러 병원과 민간요법에 열을 올렸지만 어디서도 확실한 해답은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마음에 상처가 있던 친구가 상담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반신반의하며 친구 손에 이끌려 집단 상담에 참여했다.
그 상담은 내 눈엔 말보다 행위 예술에 가까웠고, 마치 현대판 굿 같은 느낌에 묘한 감정이 들어 ‘나랑은 안 맞는다’는 판단을 내렸다.
백수이기도 했고, 친구를 통해 상담료가 부담된다는 어느 정도 사실이 담긴 적당한 핑계를 대며 그만두려고 했다.
그런데 집단 상담을 지도했던 교수님이 상담료 걱정 말고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친구를 통해 전해주셨다.
그 말을 계기로 마음을 열고 상담을 받은 뒤
마침내 오랜 통증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죄책감 때문이었다.
원치 않게 유괴되어 형제복지원에 갇히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찾아다녔던 부모님.
그 무수한 날들의 끝에,
생겨버린 내 탓 같은 엄마의 유방암, 그리고 아빠의 뇌출혈.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했던 오빠와 언니에 대한 미안함.
나만 없었다면 우리 집이 나 때문에 망가지지 않았을 텐데 하는 죄책감.
전생에 우리 엄마 아빠는 무슨 인연으로
나 같은 자식을 만났을까 하는 안타까움.
돌아가신 부모님은 이런 나를
절대 용서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을 거라는 믿음.
형제복지원에서의 불쾌한 경험까지 더해져 나를 더럽고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게 만들었다. 그 결과, 스스로를 부정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이 모든 감정이 쌓이고 쌓여
통증으로 몸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는 걸, 상담을 통해 알게 되었다.
설령 형편없는 나일지라도
부모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걸 마음 깊이 받아들였던 그 순간,
기나긴 통증의 역사도 끝이 났다.
상담도 끝나고 병원으로 마지막 진료를 받으러 가던 날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날씨는 화창했고, 이어폰에선 레이디가가의 음악이 흘렀다.
햇빛이 쏟아지는 45도 경사진 길을 걸어 내려가던 순간, 주변 사물들이 흑백에서 선명한 칼라로 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고, 나는 내게 말했다.
“진희야, 살아줘서 고마워.”
그리고 생각했다.
나와 같은 비슷한 죄책감을 경험하는 이들에게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라고 말해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하지만 그 방법을 꼭 찾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간간히
이유가 명확한 통증이 찾아오기도 한다.
술은 안 마시지만, 체대 나온듯한 인상을 즐기며 자전거, 헬스, 수영, 러닝을 병행하며
운동하는 삶을 살고 있다.
여러분도 저처럼 알 수 없는 통증에 시달린 적 있나요?
그 통증의 진짜 원인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