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 이후, 길을 찾다

잊힌 시간의 조각들 — 말해지지 못한 존재와 기억을 복원하는 시간

by 순간의 기록자

[메인 이미지 대체 텍스트: 밝은 분위기 속, 네 명의 여성 실루엣이 커피와 조각 케이크를 앞에 두고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 - ai]




*죄책감: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는 마음.『표준국어대사전』



“내 잘못이야, 나 때문이야, 나만 없었으면...”

나는 이 마음 때문에 신체화 증상까지 겪으며 오랜 시간을 고통받아 왔다.

그 고통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그럼에도 살아낸 나 자신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그리고 나와 같은 마음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라고 말해주고 싶다는 선명함이 남았다.



불안과 고마움이 뒤섞인 자리

완쾌 통보를 받고 난 이후, 이 생각은 더 깊어졌다. 지속성을 가지고 그들에게 응원을 건네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오랜 시간 나를 걱정해 준 친구들을 초대해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테이블 위에는 샤브 그릇, 수북한 야채와 고기가 놓였고, 서로의 손에는 와인 잔이 들렸다.


커피 잔이 들릴 때쯤, 잔잔해진 분위기 속에서 마지막 병원을 가던 그날을 이야기했다.

친구 1: “그럴 수 있지.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답답했는데, 네가 얼마나 힘들었겠니.”

나 : “그래서 말인데 나 상담을 통해서 ”구원“ 받았잖아, 상담이라는 게 참 필요하구나 싶더라. 나도 그런 도움 되는 일을 해보고 싶어.

친구 2: “너, 남 얘기 잘 들어주잖아. 그거 재능이야.”

나 : “마음만 있지,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

친구 3: “여성단체 상담원 교육 알아봐. 자격이 생기면 피해자 지원도 할 수 있을 거야.”


친구들과의 따뜻한 대화는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는데 큰 힌트가 되었다. 이후 검색을 통해 성폭력피해자지원 관련 활동을 하는 A여성단체 성폭력상담원 교육과정을 찾게 된다.



상담원 교육에서 배운 것

곧 A여성단체 성폭력상담원 교육과정에 접수했다.

100시간 동안 여성학과 상담학에 기초한 성폭력 개념과 유형, 법률, 수사, 재판 절차 및 상담자의 자세와 윤리·실습 등 피해자를 지원하는 핵심과정들을 배웠다.


도움이 되고 싶어 시작했는데, 강의가 이어질수록 내가 더 이해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문제인가?’라고 여겼던 경험들이 사실은 사회적 구조의 문제에서 비롯됐다는 걸 알게 되자, 내 의지는 더욱 불타올랐다.


그러던 중 강의 일정에 ‘가정폭력상담의 이해’라는 시간으로 B여성단체 가정폭력상담소 소장의 강의를 듣게 된다.


“피해자들은 전화를 거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아요. 하물며 ‘저는 성폭력 피해자인데요.’라고 시작하는 사람은 없죠. 상담을 하다 보면 여러 문제들이 뒤엉켜 성폭력과 가정폭력이 같이 드러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 순간,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상담원으로서의 내 말 한마디의 무게가 느껴졌다. 피해자의 상처에 또 다른 칼날이 될 수 있다는 걸 깊이 깨달았다. 성폭력상담원 교육을 이수한 이후 곧바로 100시간의 가정폭력상담원 교육도 받았다.



현장에서 배운 어려움

두 과정을 마친 뒤, 나는 A·B단체에서 자원 상담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벽에 부딪쳤다.

상담을 진행할 땐 어떻게든 평정을 유지했지만, 집에 돌아와 청소를 하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내담자가 떠올랐다.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리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건 상담자로서 필요한 *라포형성(상담자와 내담자가 신뢰를 바탕으로 관계를 만드는 것)을 넘어선 *역전이(내담자의 감정에 과도하게 공감하는 상태)였다.


이러다 말겠지 했던 마음은 더 커졌고, 분노와 슬픔이 내 일상에까지 스며들었다. 결국 애인에게서 “요즘 왜 그래?”라는 말까지 듣게 됐다.


얼마간 더 고집을 부렸지만, 상담 활동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감사했다며 준비해 준 마음 담긴 선물과 웃음의 시간이 지난 뒤, 건물을 나섰을 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시작한 일인데...”

나란 사람은 이것밖에 안 되나 싶어 한없이 실망스럽고 속이 상했다.



다시 시작 위치에 서다

한동안 한없이 기분이 가라앉은 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단체 활동가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해 재판 동행에 나서는 모습.

현실과 맞지 않는 법·제도에 문제점을 제기하며 법·제도 개선을 위한 간담회와 토론회를 준비하던 모습.

억울하게 발생한 피해자 구제를 위한 기자회견과 서명운동 등 여러 활동들이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래, 상담실 밖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아”

다시 무엇을 준비해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되살아나는 불씨가 느껴졌다.


“그래, 다시 시작해 보자.”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컴퓨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나는 다시 시작 위치에 섰다.


그리고 그 길이, 나를 첫 활동가의 자리로 데려가리란 건 아직 몰랐다.



당신이 멈춘 자리에서 다시 걸음을 뗀 순간은 언제였나요?

그때 무엇이 발걸음을 움직이게 했나요?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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