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가 되다

잊힌 시간의 조각들 — 말해지지 못한 존재와 기억을 복원하는 시간

by 순간의 기록자

[메인 이미지 대체 텍스트: 약간 낡은 철문이 벽에 단단히 닫혀 있다. 차갑지만, 주위에 은은하고 따뜻한 기운이 감돈다.- 그림 ai]




검색창에선 찾을 수 없던 길

검색창에 ‘*활동가’라는 단어를 입력했다.

[*활동가(activist): 사회적·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캠페인이나 활동에 적극적으로 힘쓰는 사람]이라는 사전적 정의만 덩그러니 떠올랐다. 규범 해석도 통일화되지 않아, 구체적인 설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무렵, 가정폭력상담원 과정을 이수한 뒤 B단체에서 같은 기수들과 함께 책 세미나 모임을 이어가고 있었다.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과정 속에서, 나는 어느새 활동가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연스레 꺼냈다.


“방법을 모르겠긴 한데, 활동가 일을 해보고 싶어요.”
“활동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예요?


‘말을 타려면 제주도로 가고, 사람을 알려면 서울로 가라.’는 옛 말처럼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음속 활동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여파라도 되는 듯 뜻밖의 귀한 정보를 얻게 된다.



길이 열리다

“C이주여성인권단체에서 *쉼터 활동가(여성 쉼터가 주 업무 공간으로 생활, 심리 정서 및 자립 활동을 지원하는 일)를 뽑는다는 공고가 있네. 한번 지원해 봐”


순간, 머릿속 전구 불이 번쩍 켜졌다. ‘그래 활동가가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그 일에 대해 선 글로 배운 게 전부였지만 지원해 보기로 했다. 내 마음은 이미 쉼터에 가있었다.


서류를 내고 며칠 뒤 면접 통보까지 받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긴장이 풀어질 즈음, 예상치 못한 질문이 이어졌다.


“운전면허는 있으신 거죠?”
“지금은 없지만, 기회 주시면 바로 따겠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쉼터 업무는 병원·법원, 여러 외부 활동에 차를 몰고 가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운전경력이 필수였다. 좋은 기운을 받았던 터라 아쉬움은 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면접을 본 지 한 달쯤 지나, 사무국에서 연락이 왔다.

“혹시 취업하셨나요? 지난번 쉼터채용은 운전경력이 꼭 필요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는데, 사무국에 활동가 공석이 생겨서요. 생각 있으시면 같이 일해보지 않겠어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드디어, 활동가라니!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바로 지금의 내 경우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벅찬 마음을 안고 활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내 일이 아닌 듯한 자리

일반 직장 생활만 해왔던 내게 사무처 일은 낯설고 신기했다. 배워야 할 것들이 쏟아졌다.


그곳에서는 가정폭력, 성폭력 피해 이주여성을 위한 상담과 긴급 지원, 인권운동에 따른 정책 제언, 자립지원 등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국사회에서 이주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잡이 역할 또한 함께 했다.


해를 넘겨 1년 6개월. 서류를 작성하고 사업이 계획대로 진행이 되는 걸 지켜보며 보람도 느꼈다. 그러나 일이 익숙해지면서 동시에 의문도 깊어졌다.


“나는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업무를 하면서도, 이 일이 ‘나의 일’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점점 고민은 커졌다.



흔들리는 마음

결국, 사무국장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이주여성 인권활동도 중요하다는 거 너무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일을 하면서 제 자신이 그 일 안에서 주체가 되는 감각이 없어요. 저는 제 삶과 곧바로 맞닿은, 더 직접적인 활동을 하고 싶어요.”


사무국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여러 여성단체를 읊으며 해당 단체들에 대한 나의 주관적 생각을 물었다.

“내가 봤을 땐, 너는 D단체랑 궁합이 맞을 같아.”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로부터 나는 인수인계를 마치고 첫 활동을 마무리했다.



조건 없는 신뢰

퇴사를 한 것도 미안한데, 그럼에도 사무국장은 내 앞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었다. 처음 C단체에 지원했을 때부터 나를 지켜봐 주고, 쉼터 대신 사무국 공석에 연락을 준 것도 사무국장이었다. 덕분에 활동가라는 길의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연락이 왔다.


“홈페이지 보니까 D단체 활동가 모집 공고 났던데 넣어봐.”


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하면서도 단호했다. 그러나 나는 인연 있었던 B단체를 막연히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시간은 흘렀고, 지원 마감일을 하루 앞두고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지원서 냈어?”

“아뇨,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서요.”

“야, 누가 준비를 다하고 내니? 막말로 지원서 내면 너 뽑아주기라도 한데? 꼭 지원해 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배부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반성과 함께 아슬아슬하게 지원서를 제출했고, 서류는 통과가 되었다.



D단체와의 첫 만남

D단체에 들어서는 순간 길게 늘어진 사무실 풍경이 들어왔다. 활동가들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저마다의 일에 집중하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서로를 존중하는 듯 주고받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대화와 모습들을 보며 나는 묘하게 숨이 트이는 걸 느꼈다.


면접 대기자를 맞이하는 활동가들과의 짧은 대화 속에서도 그들의 몸에 베인 친절과 존중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다!, 나도 여기서 일하고 싶다.”

복잡하던 마음이 단숨에 하나로 모아지며 선명해졌다.


면접은 꽉 채운 30분간 이어졌다. 면접대상자인 나도, 맞은편의 면접자들도 긴장된 기색이 역력했지만, 묘하게도 분위기는 무겁지 않았다. 상기된 얼굴빛 속에서도 웃음이 섞였고, 차분히 이어진 대화 속에서 서로의 진심을 전하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C단체는 왜 그만두셨나요?”

잠시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좋은 경험이었지만, 제 삶을 바꾸는 운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말을 뱉고 나니, 내가 그간 품어왔던 갈증이 문장 하나로 정리되는 듯했다.


“일반직장과 급여 차이도 날 텐데,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으세요?”

짧은 순간 뇌리를 스쳤다. 상대적으로 높았던 월급, 인센티브, 회사에서 받던 인정들. 그러나 그 끝에 늘 남아 있던 공허감이 떠올랐다.


“일반 직장 또한 인정과 인센티브도 받았지만, 하고 싶은 일이 아니다 보니 마음은 늘 편치 않았습니다. 1년 6개월간의 짧은 경험이긴 했지만, 활동가가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설령, 이곳과의 인연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활동가를 그만둘 생각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주세요.”

나는 준비해 온 대답보다, 지금 이 순간 느껴지는 진심을 꺼냈다.

“페미니즘도 뒤늦게 접했고,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배우겠다는 의지도 열망도 큽니다. 면접을 보니 저도 이곳의 일원이 되어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졌습니다. 다시 만나 웃으며 인사드릴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굳게 잠긴 문 앞에서

그렇게 여타의 우여곡절을 겪은 뒤, 나는 D단체 활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첫 출근 날, 떨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근무시간 보다 15분 일찍 도착했다.

"그래, 이제 다시 시작이야 잘해보자. 파이팅!"

마음속 주문을 외치며 크게 심호흡을 하고 손잡이를 돌렸다.


"철컥철컥"


그러나 웬걸,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도 C단체 사무국장 같은 사람을 만나신 적이 있나요?

그분은 저에게 귀인이셨습니다. 자기 단체를 떠나는 활동가에게 어떤 보상이나 기대도 하지 않은 채, 끝까지 신뢰와 애정을 보여주셨으니까요.


그 조건 없는 믿음과 신뢰 덕분에 "진짜" 활동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배운 데로 그 마음을 간직한 채 주고받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귀인이 있으신지 궁금하네요.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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