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추나무집손녀 Feb 11. 2021

거절을 못하는 사람

거절을 거절당했던 애처롭던 사람, 그게 바로 나예요.



내가 퇴사했던 곳은 직원이 15명 조금 넘는 스타트업. (현재는 30명 정도로 직원 수가 늘었다)

입사를 위해 면접을 보러 갔던 그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고, 함께 성장해나간다는 것을 모토로 함께 도와가며 행복하기 위한 일을 한다고 했다. 그전 회사에서 버티고 견뎠던 수모(이 수모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자)를 통해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고 내 능력을 인정해주고 나를 좋아해 주는 곳에서 일하자고 결심한 때라 

대표의 사탕발림은 내가 매료되기에 충분했고, 조금의 휴식 시간도 없이 바로 입사를 결정했다.


입사 후 3일 정도는 과하다 싶을 만큼 불러대는 대표의 이야기를 들으며 빠른 적응을 노렸고,

그 이후부터는 '빨리빨리' 진행해야 하는 업무들로 정신없이 일을 해나갔다.


작은 회사니까, 너 밖엔 할 수 없으니까, 네가 에디 터니까, 네가 비주얼을 담당하니까 등의

말 같지 않는 이유와 함께 나는 시간이 갈수록 All Around Player로 등극했다.


에디 터니까 새로 론칭하는 브랜드의 스토리텔링부터, 펀딩 촬영 담당이니까 브랜드 룩북 촬영도

대표의 눈에 거슬리니까 PB브랜드 룩북 촬영도 빨리, 회사소개서가 필요하니 그것도 새로, 

마케팅 이력이 있으니까 마케팅 팀장이자 수장의 역할도. 나이가 많으니까 직원 정신 교육도.

비주얼을 다루니까 회사 이사 인테리어도...라는 식


지금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는데, 진짜 그 많은 것들을 숨 참으며 해온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짝짝짝 (어이구 이 답답아)


정말 내가 바보였던가.. 스스로를 다그친 일이 있다. 

왜 나는 싫다고, 안된다고, 절대 못한다고 거절하고 다른 후배 동료들처럼 눈을 부라리며 (싹수가 없어도 나는 내가 먼저 살아야겠다는 마인드로) NO를 외치지 못했을까 생각하며 

과거로 돌아가서  답답함과 분함으로 이미 다 끝난 상황과 상처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리고 눈을 뜨고 다시 생각해 봤을 때, 나는 어린 후배들처럼 '사원'이 아닌 관리자였고 

NO를 외쳐도 늘 돌고 돌아  YES만을 강요당하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나이와 경력의 짬바가 있으니 예의를 갖추어 그건 좀 힘들 것 같다고 이야기해봤자, 소용이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 순간은 알겠다며 수용하는 듯했지만 몇 주만 지나면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맡겨둔 보따리를 내놓으라는 식으로 업무 푸시를 당하기 일쑤였고, 힘들고 상황이 이러하여 도움을 청하면 '계집애 같다'라는 식으로 징징거리는 사람 취급하며 성차별적이지만 아닌척하는 그의 가스 라이팅 멘트를 고스란히 들어야만 했다.


처음에는 인정받는 것 같아서,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마치 중독된 것처럼 기쁘게 그 일들을 받아들였지만, 그 중독과 희열은 곧 '나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라는 의문과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그 일은 어디로?'라는 자괴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나는 점점 병들어갔다.  


특히 '전문성'이라는 나의 직무는 옅어지고 마케팅팀을 맡고 있다는 이유로 마케팅이 주가 되고 콘텐츠가 차선의 차선, 그리고 차선으로 밀리는 그 순간들을 마주하며 나는 나를 잃었던 것 같다. 


일이라는 것은 사람을 성장시키며, 빛나게 하고 또 그 일을 통해 월급을 받으며 미래를 준비해갈 수 있게 하는, 

한 사람의 '나'로써 탄탄하게 서 있을 수 있게 힘을 기르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쌓아온 경험과 경력, 그리고 책임감을 이용하여 다각도로 '써먹는' 기업에게 과연 밝은 미래가 있을 수 있을까? 


거절은 거절한다는 인간 착취적인 그 기업에게 뜨겁고도 암울한 미래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런 대표를 응원하고 지지하며 독재자로 그를 군림하게끔 만드는 이사와 관리자들의 노예근성에도 애잔한 미소를 보내고 싶다.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은은한 향기가 나는 어른이 아닌 시큼털털한 노예 냄새가 나는 나를 발견하고 나는 흐려진 초점과 빙글빙글 돌 것만 같은 저혈압을 안고 퇴사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떠나온 것에는 후회가 없다.


한 번 만들어진 한 조직의 All Around Player는 조직과의 작별이 아니면 절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All Around Player가 된다면, 먼 훗날 내가 직접 사업을 하게 되었을 때. 

많은 일들을 정말 내가 온전히 정하고 책임져야 할 때. 그때 꼭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아직은 나는 나로, 나의 전문성을 더 키울 수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시가 박혔던 자리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