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실현이 자아도취가 될 때
최근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조금 다른 정의를 하려고 한다.
'일이란 먹고 살기 위한 수단'
어쩌면 당연한 이 말이 어느 순간 당연하지 않은 말이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종교인도 아니고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는 숭고한 삶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좋은 건축을 하고 싶었다.
수년 전 좋은 건축에 대한 정의를 나름대로 내렸다고 생각했지만 조금씩 변질되어 가기 시작해 어느 순간 돌아보니 '자아도취'에 가까운 일을 하고 있었다. 순전히 '일'을 일로 보지 못한 결과는 이 일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게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깨달았다는 것이 실로 안타깝다.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 이론을 살펴보면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과 애정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의 순으로 발전한다. (물론 이런 저런 욕구가 붙어 자아초월의 욕구(타인을 위한 삶)까지 더 나눈다) 그 중 나는 자아실현의 욕구에 지나치게 집중했다. '건축은 예술인가'의 원초적 질문에서 겉으로는 건축은 예술이 아니라고 주구장창 외쳐왔으나 속으로는 '나의 예술'을 찾아 자아도취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자아실현은 후순위로 밀려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나는 '일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 볼 여유를 얻었다. '오늘만 사는 놈'이라는 영화 대사처럼 당장의 생리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욕구에 집중하면 잡념이 사라진다. 그래서 오히려 요즘 더없이 정신이 맑은 느낌이다.
일을 '먹고 살기 위한 것'으로 새롭게 정의내리면서 변질되었던 '자아도취'를 걷어낼 수 있었다. 오히려 건축에 대한 더 진지한 접근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공공 건축을 한다는 자만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좋은 것은 무엇인지 계속 고민해 나갈 수 있는 터닝 포인트가 될지도.
적어도 앞으로 나는 '우리'로 포장된 '나의 건축'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은 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 한 공모전에 참가한 작업을 비평한 적이 있었다. 3주간 고생한 그 안에 대해 실로 신랄한 비평을 했다. 작은 여객선 터미널인 그 곳의 주인이 누구인지 생각해보면 답은 너무나 명확했다. 섬의 주민들, 방문객들이 터미널에 들르는 목적을 생각해보면 터미널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은 '대합실'이다. 표를 끊고 배가 오는지 안오는지 기다리는 그 공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심지어 그 배를 가장 많이 이용할 주민이라면 풍경은 더이상 이상향이 아니고 지지리도 궁상맞은 삶의 파편일지도 모른다. 버스 터미널은 내 버스가 언제 오는지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고 여객선 터미널은 여객선이 언제 오는지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 기다리는 시간이 편안하다면 더없이 좋은 터미널인 것이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스스로를 보면서 그제야 알았다. 나는 사람들이 공간을 어떻게 사용할까 생각하는 그 과정이 즐겁구나. 그 정도라면 어떤 형태의 일이라도 상관없겠구나.
우리는 간혹 일에 지나친 가치를 부여하는 우를 범한다. 어떤 일은 가치 있고 어떤 일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 통념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스스로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 아닌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 정도의 삶의 의미를 일에 두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먹고 사는 것만이 삶의 목적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의 환경은 이미 충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