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번째로 읽게 되는 책 입니다.
사념은 우리의 육신을 고달프게 만들고 기도와 명상은 우리를 보이지 않는 틀에 가두어 종속을 강요할 뿐입니다
오늘의 시선으로 지난 세계를 볼 수 없고 지나간 시선으로 오늘의 세계를 볼 수 없다면 훗날 지금 보고 있는 숲은 또다시 달라질 것이다
몰려오는 시간에 굴종하고 운명에 순응하는 것만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일까?
일상에서 기쁨을 찾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일까?
사실 책의 시작은 '총을 닦고 있는 코르소'로 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임팩트의 한 순간', 사진을 통한 임팩트가 결국 이렇게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 진다는 것이, 어쩌면
작가는 그 '임팩트의 한 순간'을 다시 '인생의 임팩트의 한 순간'으로 이야기를 하려고 한것은 아닐까 추측을 하게 됩니다.
"무엇을 얻었을까?"
머리속에서 빙빙도는 화두는 바로 이것 '무엇을 얻었을까?'입니다. 작가는 혹은 코르소는 무엇을 얻었을까? 경계 안의 삶의 단조로움의 해방의 필요성? 혹은 경계 밖의 동경에 대한 도전?, 인간 군상들의 의미부여의 부질없음... 찾아 헤메이는 웨나는 神이 아닙니다. 그저(이런 부사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바람을 만드는 사람', 그러나 책의 전반에 걸쳐 바람은 카우초들을 두려움으로 만드는 대상입니다. 결국 코르소는 바람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코르소는 죽음으로 웨나와의 만남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물론 그래서 무엇을 얻었는지에 대한 고민이 머리에 남지만... 그렇다면 작가는 무엇을 얻었을까?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말합니다.
"주인공 코르소의 장중한 행로가 마감될 때 마치 내 남은 삶을 당겨 살아버린 것 같았다"
말이 너무 어렵습니다. '내 남은 삶을 당겨 살아버린 것 같았다' 니... 장중한 행로는 코르소의 자유의지에 기반한 것이지만, 사실 책 속의 죽음 자유의지라고 할 수 없는듯 보여졌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더 복잡해집니다. 어쩌면 코르소의 여정을 통해서 그가 얻은 것은 지혜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바람을 만드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바람이 시작되는 지구의 땅끝은 '파타고니아'가 정답이라는...
코르소의 여정과 일반적인 삶의 여정을 그리고 코르소의 웨나와 일반인의 추구점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경계의 안, 밖 혹은 안주, 도전의 양면에서 사실 코르소와 일반인의 차이점은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단지 그 길을 계속가느냐 혹은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가 중요할 뿐. 사뭇 궁금함이 더 하게됩니다. 코르소의 '웨나'라는 화두에 대한 답은 얻은 것인지.
식인 퓨마의 존재가치를 혼자 씁쓸하게 이어갑니다. 커다란 존재감에서 사용가치가 완전 저하된 가죽으로, 상관관계를 찾아봅니다. 모르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답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문득 어린왕자와 포레스트 검프가 ,머리에 떠오르는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납니다. 어린왕자는 어리기에 궁금함을 기반으로 질문과 해소 혹은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여정을 이어나갑니다. 포레스트 검프 역시 뜀니다. 그저 해야만 하는 이유가 없이 그렇게 뛰다가 그냥 그만두게 됩니다. 어린왕자도 검트도 여정의 당위성은 존재하지 않아보입니다. 그러나 코르소는 어떤가 싶습니다. 책임과 회피의 저울에서 보자면 두말할 것도 없이 회피입니다. '이기적인 회피' 생각이 다리를 얻는 듯 합니다. 스님들의 '화두'라는 것에 진한 의구심이 발생하게 됩니다. '화두'와 '보시' 그리고 '이기'와 '이타', 미천함에 말을 줄여야 할듯 합니다. 그리고서 나를 바라봅니다.
'여정과 찾음', 목상의 주인공은 경계밖으로 떠났고, 코르소는 경계 밖의 경계 안이라는 파타고니아에 있었습니다. 코르소의 삶이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게 비범하지 않구나 싶기도 합니다. 너무나 일반적인 인간군상과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잡념이 너무나 많이 듭니다. 코르소는 아마도 죽음을 통해 경계 밖으로 나가 웨나와의 진정한 동행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래서 얻는게 무엇인지는 사실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은 참 좋은 듯 합니다. 사고의 나래를 펼수 있기 때문입니다. 글이라는 팩트를 기반으로 나름의 사고의 나래를 펼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