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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네이트 Oct 25. 2017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고 한마디...

                                                                                          

69, 70번째로 읽게 되는 책 입니다.

 순서는 잘 모르겠지만 하루키 소설의 커렉터를 하고 있습니다. 상실의 시대를 시작으로 순서는 모르지만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양을 쫓는 모험, 댄스댄스댄스, 태엽감는새, 1Q84,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어둠의 저편, 슬픈 외국어(수필), 해변의 카프카, 1973년의 핀볼,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그리고 이 책이 나옴을 기다린 듯이 구매하여 또 한권의 하루키의 책을 서재에 놓이게 합니다. 서재의 한칸을 완전히 하루키로 채웠다는 기쁨과 이후에 책이 나오면 어떻게 자리를 잡아야 할까하는 약간의 우려도...                                    

                                                                                       

'단순한 상상은 아닐 것이다'

 하루키의 글을 보면 드는 생각이 바로 '단순한 상상은 아닐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체험을 했을 것이라는 느낌이 이 책을 읽으면서 가지게 됩니다. 픽션이라는 소설의 근간이 어짜피 작가의 체험 기반이라는 일반적인 사실을 무시한다고 해도, 어쩌면 그래서 소설의 결과의 모호함이 작가의 체험의 '현재까지'라는 것과 그 이후의 체험이 아직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됩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체험을 알리는 미션을 주었으며, 그는 그것을 아직은 경험하지 못한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닌 글이 쓰여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끊긴듯 보여지는 글들에게서 끊여지지 않은 그 무엇인가를 볼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3차원에서 한명 두명을 4차원으로 이끌고 어느듯 인터스텔라에서의 5차원이라는 연결고리를 그를 역시 책에서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책의 '기-승-전'과는 다른 '결'은 읽는 이의 기대치를 심각할 정도로 훼손하는 것을 보면, 역시 끝이 아닌 그의 체험치의 현재성(현재까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쩌면 또 다른 그의 책을 기대할 수 밖에는 없는 현실에 이르게 되기도 하는 것인듯 합니다. 

蛇足이 된듯 하기도 합니다. 


 하루키의 글을 보면 빼놓을 수 없는 소재가 몇가지가 항상 등장합니다. 음악, 커피, 음식만들어 먹기, 패 안끼치기, 그리고 이번 소설에는 없지만 수영. 침해할 수 없는 1인의 삶의 유지에 완벽한 조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기에 그 누구도 화자의 세상으로 함부러 침범을 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교류라는 것은 내적인 완성도를 가질 수 없는 그런 구조가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자의 대상들이 어쩌면 화자와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되는듯 하기도 합니다. 반응을 하는 교류라기 보다는 들어가면 나오지 않는 블랙홀과 같은 존재로써의 교류의 대상이 되기에, 이타주의가 극도의 이기주의로의 발현을 화자를 통해서 볼 수있게 되는듯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구조주의의 최고로 친다는 '이방인'을 넘는 글이 어쩌면 하루키의 글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화자의 행동방식만을 기준으로 볼 때 입니다. 그래서 인지 하루키를 읽으면 교류보다는 나의 내부로 뭔가가 이끌림을 종종 겪게 되곤 합니다. 다행이 원체 성격이 그런지라 금방 원위치를 외치게 되긴하지만...


 책의 제목을 한번 생각해 봅니다. '기사단장 죽이기' 2권의 부제 이기도한 '전이하는 메타포'를 기반으로 본다면, 기사단장의 메타포는 아마도 나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왜 

기사단장으로 이데아가 나타난 다는 것일까 입니다. 인물들를 살짝 정리해 봅니다. 

 - 화가 아마다 도모히코, 빈에서 공부하다 나치의 암살에 가담, 우여곡절 끝에 살아돌아와 일본화 

   전향, 시대작가로 인정, 비밀공간에 기사단장 죽이기 은거. 그리고 기사단장의 죽음을 보고 사망

 - 돈 많은 멘시키, 딸일수 있는 아이를 지켜보기 위해 사는 남자, 특별한 명분이 없는 조연이하의 

   역할 수행 하지만 많은 부분 등장

 - 마리에, 멘시키의 딸일수 있는 아이, 구원의 대상으로 표현

 - 이데아(기사단장 化), 구원의 도움이있자, 죽어야만 할 대상

 - 화자, 초상화를 그리며 그럭저럭 사는 남자, 구원자


문득 생각해보니 난징학살에 대한 이슈는 하루키의 시선을 이끈 것은 아니듯 싶습니다. 그 그림이 그려지려면 아무래도 이데아는 기사단장이 아니고 기사단장을 죽인이자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죽인이는 기사단장의 죽음에 대해 기사단자의 청부를 받은 이가 되어야 하는데, 사죄를 청부하여 죽음으로 갚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역사적 문제제기와 죄갚음이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치정으로 엮으면 좀더 스토리가 맞아돌아가는 듯 합니다. 문제는 빈에서의 암살은 여인과의 사랑에 의한 시도로 볼 수가 있지만, 병원에서의 종용에 의한 살인과 구제의 대상은 개인적인 치정과는 거리가 있기에... 

개별적 인물들을 머리속에 상상을 해보니 역시 행위의 개연성은 만들어지지가 않습니다. 어쩌면 이런 것이 인생이지 싶기도 합니다. 삶이라는 것이 개연성을 기반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다는 것, 즉 우연한 무엇인가의 일이 발생되어 진행(펭균부적, 식칼, 방울)이 되지만, 그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결과는 그저 그럴수도 있다는... 하루키가 이글을 본다면 경악을 할지 모르겠지만, 암튼 그렇습니다. 암튼 문득 드는 생각은 화가가 아니고 시인이여도 이야기의 진행에는 큰 차이가 없겠다 싶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림을 그리기에는 그려진 무엇보다는 그릴 수 있는 무엇이 더 클 수 있기에...


 글이 쓰여지지가 않습니다. '전이되는 메타포'에 빠진듯 합니다. 이중 메타포에 빠지면 위험하다는 글이 문득 머리를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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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키의 책은 추리소설 같아서 한번 잡으면 뒤가 궁금해져 놓을 수 없게 합니다. 그런데 문득 다 읽고 나면 무엇을 읽었는지 머리에 명확한 상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함이 있습니다. 평온한 일상속에 일상적이지 않는, 그러나 역시 너무나 일상적인, 그러나 그 속에 존재하는 그 실체, 잡히지는 않치만 무언가 있음은 직관이 알고 있는데, 직관이 형상화가 쉽지가 않은, 어쩌면 형상화의 부조리를 염두에 두고 

쓰는 작품처럼... 어렵습니다.


구조주의 입문서에 나온 글을 한번 인용하자면,


'무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결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알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같이 노력해온 결과가 바로 무지입니다'

널은 뛰지만 어쩌면 이 한줄을 난징대학살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 쯤으로 포장을 하면 그럴듯 포장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집니다. 우리는 종종 말하곤 합니다. 무지는 죄가 아니라고, 하지만 죄가 아닐 수 없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마리에의 실종에서도 보여지듯이 기억이 없다면 덮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연결은 하루키만이 아니라는 생각...


책의 글을 좀 보자면,


'클로드 드뷔시는 일찍이 오페라 작공이 정체에 빠졌던 시기를 '나는 매일같이 무rien를 만들기만 했다'고 표현했다'

하루키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중에 한가지가 바로 이런 표현입니다. 전조가 없어 보이는 무의미한 듯한 글이 그렇지 않은 전조임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無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빼앗아가는 게 있는가 하면 시간이 가져다주는 것도 있기에, 또한 無가 존재의 부재가 아니라는 사실, 그렇다면 有도 존재의 형상화도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데아처럼...(물론 이데아의(기사단장) 존재의미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좁고 어두운 공간에 혼자 갇혀 있을 때 가장 무서운 건 죽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영원히 여기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살지 않을 수 없다는 현실이 항상 눈 앞에 버티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죽음을 택할 수도 없도 죽음이라는 영원성이 또 다시 또아리를 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아마도 도모히코는 기사단장을 죽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이데라는 기사단장으로 현현하여 영원이라는 두려움을 벗어나는 방법이 단순함의 지속성을 끊어버리는 것이라 알려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야 한다면 사는 방법을 스스로가 변화시켜야 한다는 식으로...


'유일무이의 진실을 밝히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바라보며 그 안의 가능성을 곱씹는 일이다'

'흔들임 없는 진실보다는 오히려 흔들릴 여지가 있는 가능성을 선택하겠습니다. 그 흔들림에 제 몸을 맡기는 쪽을 선택할 겁니다'

 쉽지 않은 글입니다. 현실화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능성, 혹은 흔들림에 몸을 맡기는 것이 어쩌면 세상을 살아갈수 밖에 없다면 유일하게 살수있는 방식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하루키는 화자의 재 결합을 아마 진실이 아닌 삶의 가능성의 결과로 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멘시키의 딸 일수도 있는 아이, 화자의 딸 일수도 있는 아이, 그리고 그 아이는 아마 인생의 흔들림이며 그 둘은 그 흔들림에 몸을 맡길 수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이라는 팩트에 갖혀 있다는 것이 다시금 생각을 해보니 어깨의 무거움 짐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흔들림에는 변하는 것이 없지만, 사실에는 너무나 많은 변화가 수반될 수 밖에는 없으니... 


'역사에는 그대로 어둠 속에 묻어두는 게 좋을 일도 무척 많다네, 올바른 지식이 사람을 윤택하게 해준다는 법은 없네. 객관이 주관을 능가한다는 법도 없어. 사실이 망상을 지워버린다는 법도 없고 말일세... 중략 그림이 말하게 놔두면 되지 않나'

무서운 말입니다. 이 책은 회자되는 난징대학살에 대해 잘못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둠 속에 묻어두는 게 좋을 수 있다니... 그림이 말하게 놔두면 되는 건가요? 결국 도모히코는 그림을 그렸다가 꺼내지 못하고, 그 그림은 화자가 꺼냈다가 다시 숨고두고, 그리고 불이나고 없어집니다. 그런게 역사이고 현실인가요? 객관이 주관을 능가하는 법이 없다면... 고발인가요? 혹은 팩트인가요?


'카메아트 엠프토르(매수자 위험)'

인생이 그렇습니다. 매수자 위험을 인지하는 자와 회피하는 자. 도모히코는 아마도 매수자 위험을 회피했고, 결국 매수자 위험은 마리에와 화자가 안을 수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아내와의 관계회복 역시. 


'위스키를 잔에 따르니 무척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가까운 사람이 마음을 여는 듯한 소리다'

표현이 너무 좋았습니다. 위스키 소리의 마음을 여는 소리로... 소주에서도 종종 들었으면 합니다.


'형태를 지닌 것들에게 시간이란 위대한 존재지. 시간은 한없이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동안은 상당한 효력을 발휘하거든'

시간만이 위대한 존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단지, 시간만이...


 1Q84 이후에 7년만이라 것이 참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나자마자 또 다시 하루키의 새로운 책의 진행이 어떻게 이루어 질까가 궁금해 집니다. 또다른 그의 '현재까지'가 어떻게 만들어 질지가.

원체 많이 읽히는 책이고 누구도 한번 잡으면 놓을 수 없는, 그러나 난징을 보는 시각은 좀더 고려의 

여지가 있어야 하는 책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종종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 처럼 쓸 수 있을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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