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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멩이 Jan 03. 2020

머뭇거리는 믿음

편혜영 「저녁의구애」

 외로움은 타인을 고려할 때 생긴다. 단순히 혼자이기 때문에 외로운 게 아니라 타인들이 나의 존재를 모르거나 외면하기 때문에 외롭다. 모든 존재론적 외로움은 타인을 향한 외로움이다. 타인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는 이러한 외로움을 회피하기 위한 방법이다.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잘 살 수 있다는 시니컬한 자신감이 여기에서 나온다. 극단적으로는 타인을 이미 죽은 것으로 처리한다. 「저녁의 구애」에서 김의 태도가 그렇다. “아직 죽지 않았다고?”라고 말하는 김은 친구의 어른을 사실상 죽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럼으로써 지우려는 것은 어른의 시선, 타인의 시선이다.

 김은 어른에게 “크게 신세를” 져서 이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은 “잊어도 좋을 만큼 충분히 시간이 지났다.”며 어른과의 관계를 청산하려 한다. 혹은 자신도 모르는 무언가를 은폐하려 한다. 김은 친구와 여자에게도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다. 친구는 지나간 우정, 여자는 밋밋한 관계에 불과하다. 타자를 시니컬하게 부인하는 태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은 살아 있다는” 자신감이다. “김은 한 번도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고 그에게 “소멸은 먼 미래의 일이었다.” 그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으며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그 확신은 타인을 괄호친, 기만적인 확신에 불과하다.

 영원한 현재를 살고 싶은 이에게 과거와 미래를 괄호치는 것은 필수적이다. 김에게 “탄생은 지나간 일이었고 소멸은 먼 미래의 일이었다.” 출생과 임종은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타자와 함께 맞이하는 일이다. 탄생과 소멸을 외면하던 김 앞으로 크게 심호흡을 하는 마라토너가 지나가고 트럭운전사는 사고로 불길에 휩싸인다. 삶과 죽음은 먼 곳이 아니라 그의 바로 앞에 있었다. 김은 불길을 바라보다가 전화기를 꺼내 여자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불쑥 사랑을 고백한다.

 김의 고백은 순수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나오게 되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러 온, 불문명한 위협이 존재하는 도시에서 김은 자신 또한 불행에 맞닥뜨릴 수 있다는 불안을 느낀 것이다. 김이 생각하는 불행이란 “모두 무사한데 자신에게만 불운이 닥치는 것”이다. 자신에게 고통이 찾아오고 타인들은 자신의 고통을 모르거나 외면하는 것. 이것을 피하기 위해 김은 타인을 지우고 자신은 완전하다는 기만적인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타인에게만 일어난다고 생각했던 불운이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와중에 이러한 확신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그는 “상투적이고 진부”한 고백이라도 해야 한다.

 김의 구애를 단순히 두려움에서 나온 자기방어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히려 자기방어는 구애를 하기 전, 모두에게 취하던 냉소적인 태도에 있다. 그는 타인들을 괄호친 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일이 더 이상 가능할 수 없음을 받아들인다. “그는 두려움이 점지해준 고백 때문에 곧 부끄러워질 것이며”, 그 고백을 “얼버무리려고 애를 쓸 것”이지만 “그럼에도 당시 마음에 인 감정의 윤곽이 무엇인지 헤아릴 것이었다.” 김은 자신이 죽음과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동시에 어찌 보면 환상에 불과한, 타인을 향한 특정한 감정이 존재함을 믿는다. 확신에 찬 믿음은 아니며, 부끄럽고 번복하고 싶은 믿음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헤아리게 되는 믿음이다. 앞으로 김의 삶에는 이와 같은 머뭇거리는 믿음, 확실한 답신도 얻을 수 없는 믿음이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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