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
아베 고속열차로 아토차 역에 내려 호텔로 향한다. 호텔은 걸어서 10분 거리지만 무거운 가방을 메고 끌고 걷기에는 힘이 부친다. 택시를 잡는다. 세비야와 기본요금이 다르다. 미터기가 7.5유로에서 시작한다. 세비야 기본요금 2.5유로. 마드리드는 대도시라 택시비가 비싼가 보다 생각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바가지요금이었다. 장거리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택시 기사에게 길 건너에 있는 호텔로 가자는 내 주문이 반갑지 않았던 것이다. 요금은 7.5유로, 10유로를 냈는데, 어라? 거스름을 1유로만 준다. 따질까 하다 그만두고 내린다. 마드리드 첫인상은 약간 쓴맛.
호텔 메디오디아. 아토차 역과 가까워 이동하기 좋을 거 같아 잡아 둔 호텔이다. 호텔 뒤쪽으로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물관(이하 소피아 미술관)과 크지 않은 아이스링크가 있다. 활기차고 우아한 거리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프라도 미술관이 12세기- 19세기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면 소피아 미술관은 스페인 근현대 미술작품을 가장 많이 확보하고 있다. 저녁 7시 이후 입장객은 무료. 가난한 내게 얼마나 반가운 정보인지 모른다. 소피아 미술관은 스스로의 명성도 그러하지만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게르니카를 보기 위해 나는 저녁을 먹고 미술관 산책에 나선다. 2층 전시실 한 칸이 피카소 룸이다. 벽면을 가득 채운 크기로 흑백 사진처럼 그려진 게르니카 앞에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다. 입체를 분해해서 평면으로 그려내는 피카소 특유의 화법이 전쟁의 참상을 묘사하는 데 주효했던 것일까. 기하학적으로 절개된 화면과 변형된 사람들 모습, 흑백 모노톤으로 강조된 분위기는 그림을 해석하고 싶게 만든다. 짓눌려 절규하는 사람, 창에 찔려 비명을 내지르는 말을 지나 왼쪽 끝, 죽은 아이를 안은 어머니에게서는 분노와 비통함이 절정에 이른다. 전문가들 견해로는 왼쪽에 그려진 소는 희망을, 바닥에 깔린 채 누워 있는 남자의 손에 칼과 함께 들린 꽃은 희망을 상징한다고 한다. 전쟁의 악몽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노력이 게르니카의 주제인 셈. 그렇다면 게르니카는 계몽성 짙은 포스터로 봐야 할까. 누군가 피카소에게 물었다. 그림 속 소와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고. 피카소는 대답한다. "소는 소이고 말은 말이다". 따라서 나의 소견은, 게르니카는 게르니카다. 전쟁으로 찢기고 할퀸 현장을, 그것을 목도한 작가가 자신의 진노한 심상을 폭풍처럼 화폭에 쏟아 낸 것이다. 전쟁 속에도 꽃은 피고 생명은 태어난다. 굳이 주해를 가할 필요가 없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항구도시 빌바오에서 북동쪽으로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조용한 시골마을이다. 1937년 스페인은 보수와 진보의 대결로 내전이 한창일 때였다. 이때 통치자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그는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독일 나치에게 손을 내미는데 그 대가가 게르니카를 무기 실험 장소로 내어주는 것이었다. 평화롭던 마을에 갑자기 집중포화가 시작되고 4시간 여 만에 1650여 명이 사망한다. 마을 주민 1/3에 해당하는 숫자다. 파리에서 만국박람회 출품작을 준비하던 중 이 소식을 접한 피카소는 작품의 방향을 '게르니카 고발'로 잡는다. 박람회까지 남은 시간 50일, 그는 자신의 열정과 천재성을 쏟아부어 게르니카를 완성한다. 게르니카는 그해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어 전 세계에 스페인 내전의 야만성을 알리게 된다. 피카소는 생생한 전쟁 장면을 위해 신문 기사와 루벤스 작품 <전쟁의 공포 the horrors of war> 등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피카소 관을 거닐며 그림들을 보고 있자니 생전에 그와 교류했던 중국 화가 장다첸에 생각이 미친다. 피카소는 그에게 용필법과 동양의 회화정신을 배웠다고 한다(홈 오피니언 매거진 '중국, 중국인'에 게재된 한인희 대진대 중국학과 교수 글에서). 두 사람은 서로 깊이 교류했다 하니 피카소 그림에 스민 동양적 색채와 부드러움이 그의 영향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게르니카 역시 무섭고 슬픈 이야기를 전하지만 유려한 곡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예술 작품에서 지성의 교류를 발견하는 기쁨은 예술 감상의 또 하나의 지류다. 한참 동안 게르니카 앞에 서 있다 1층 기념품 상점으로 내려온다. 게르니카 포스터를 한 장 사 든 나는 한껏 마음이 부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