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적으로 순하고 털털한 술
늘 그래왔듯이 삶은 기다림의 변주다. 생의 어느 지점쯤에서 한 번쯤 꿈꾸었던 비어버린 시간. 그 시간이 전염병에 이끌려 갑자기 와버렸다는 걸 제외하면 이 감금된 시간은 뭔가를 시도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막걸리를 빚기로 했다, 밀주를 빚듯이. 밀주라 할 것까지는 없으나 남들은 비상식량 준비로 마트 바깥까지, 건물을 뱀처럼 휘감으며 줄을 선 이때 귀한 쌀로 술을 빚으니 밀주라는 것이다.
하필 막걸리냐고 물을 사람이 있겠다. 세상이 다 멋 부리며 마시는 커피를 나는 못한다. 약한 속이 커피를 이기지 못하게 되면서다. 주치의는 커피 한 잔을 마시게 되면 바나나 두 개를 먹으라고 처방을 내줬지만 바나나를 먹고 나면 입안에 남아야 할 커피 향은 달아나 버리고 쓸데없이 배만 불러온다. 대신 술이 늘었다. 애주가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고 과음을 해도 속이 편안한 막걸리를 즐기게 되었다는 얘기다.
멥쌀 보다 찹쌀이 풍미가 더 하다 하여 찹쌀로 술밥을 짓기로 하고 책도 사보고 인터넷도 뒤적여가며 레시피를 고안했다. 우선 8시간 찹쌀을 불린 후 두 차례에 나누어 걸러볼 참이다. 안내서에는 찹쌀을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씻어 앉히라고 되어 있지만 나는 물 섞인 우윳빛 정도 되도록 적당히 씻어 술밥을 짓는다. 술덧(발효과정에서 위로 뜨는 것. 이 술덧을 거르면 막걸리가 된다)이 무거워지겠지. 막걸리는 너무 맑으면 얌체 같고 너무 탁하면 주정(酒精)이 게을러 보인다. 중간점을 찾는 게 쉽지 않지만 나는 일단 맑게 걷어 올린 것보다 어리숙하게 거르기를 택한다. 찹쌀 눈을 다 씻어 버리기도 아까운 일이다. 감미료를 넣지 않을 것이니 찹쌀만으로 감칠맛과 깊은 맛을 잡아내야 하는 문제도 있다.
고슬고슬 잘 익은 술밥 위에 누룩을 얹고 물을 붓는다. 막걸리 발효의 시작이다. 발효가 끝나면 술은 숙성계로 넘어간다. 내가 꿈꾸었던 비어버린 시간이란 속도에 내몰린 발효의 시간을 정지시키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좌충우돌했던 지난 시간. 여지없이 뒤따라오던 후회. 미숙한 판단으로 저지른 실수, 아니 어쩌면 오만이 낳은 참담한 실패. 작은 파도에도 휩쓸리던 허약한 심장. 전진한다 하고는 하염없이 옆으로만 걷는 게걸음처럼 열심히 살았으나 문득 다른 지점에 서 있게 되던 많은 날들. 이만큼 사람 되느라 그리 모질게 발효 과정을 거쳤던 모양이다. 나를 삐걱이게 했던 누룩들…. 발효를 거듭할수록 술은 진해진다, 담금질된 인생이 감칠맛을 내듯.
사실 막걸리 맛은 누룩 맛이다. 가양주라 함은 이 누룩 맛의 차이를 일컫는다. 인생을 발효시키는 데에도 적당한 누룩이 끼어야겠지. 좋은 누룩은 좋은 술의 촉매가 된다. 나를 스쳐간 사람들 내가 지나 온 사람들, 우리가 서로에게 선한 누룩이었기를 바랄 뿐이다. 아직 누룩을 뜰 실력까지는 갖추지 못해 마트에서 누룩을 사 왔다. 이번 막걸리가 절반의 시도에 불과한 것이라 섭섭함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시큼한 누룩. 살아본 사람은 안다. 인생이 이 맛인 걸.
발효 후 나흘 만에 술을 거른다. 술덧이 진해져 은빛이다. 이를 걷어 면포 위에 둔다. 면포로 술덧을 말아 싼 후 젓가락을 끼워 넣고 뭉근히 힘을 주어 짜낸다. 주르륵 막걸리가 화답한다. 찹쌀과 누룩, 물만으로 걸러낸 막걸리는 순도만큼이나 깊고 진지하다. 아직 숙성에 이르지 않은 원주는 탄산감이 들지 않아 원시의 우물처럼 고요하고 비밀하다. 이 긴장을 해체하려 입술을 댄다. 감동이 밀려온다. 기다렸던 맛인 게다.
색이 탁하여 탁주. 무심한 이름 때문일까. 탁주를 마주하니 복잡한 세상 일이 먼지처럼 작아진다. 걱정이란 어차피 시간이 해결할 텐데 어째서 놓여나지 못하고 붙들려 사는 것인지…. 걱정을 버리기로 한 그 사소하고 단호한 결정을 내리기에 탁주만 한 벗이 없나 보다.
마구 걸렀다 또는 바로 걸러 먹는 술이라 하여 막걸리, 빛이 탁하다 하여 탁주. 이름이야 아무래도 좋다. 귀한 집 자식일수록 천한 이름을 써 키우지 않던가. 발효를 마친 막걸리는 탁하기보다 우아하다. 여러 겹, 레이어가 된 달빛이고 여린 살빛이다. 귀공녀의 살색을 닮은 빛깔은 대양의 표면처럼 투명하며 온순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순수의 도량 같다. 나는 이것을 유리병에서 도자기 잔으로 옮겨 붓는다. 양은 잔이 없기도 하지만 양푼에 막걸리를 따르는 것은 그를 너무 푸대접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다. 식은 밥 모아서 막걸리 담던 예전에야 서민의 술이었지만 21세기 막걸리는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이 즐겨 찾는 웰빙주다. 와인 잔을 까다롭게 고르는 것을 생각한다면 막걸리도 격에 맞는 옷을 입힐 필요가 있지 않을까. 푸른빛 도는 도기에 담긴 막걸리는 소박할 뿐 아니라 바라보기 벅찰 만큼 그윽하고 단정하다. 잘 살아온 중년의 풍미다.
우리는 누구나 기저질환을 안고 산다. 잊을만하면 도지는 천식과 복통, 그런 거 말이다. 독해봤자 알코올 함량 16도인 막걸리는 그런 우리를 쓰러뜨리지 않아 좋다.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끝없는 고통에 시달릴지라도 가끔 달려가 안길 가슴이 있다면 인생은 살 만하지 않던가. 막걸리는 언제든 나를 받아주는 그런 술이다.
며칠을 더 기다려 여드레 만에 나머지 술을 걸렀다. 도수가 높아지고 산미가 더해졌다. 위로 떠오른 맑은 호수 같은 청주. 이 청주를 따로 떠서 따듯하게 데워 마시니 맛이 일품이다. 나는 사실 오래 기다린 독주보다 사나흘 기다려 맛본 담백한 탁주가 더 좋지만 한 종지 됨직한 뜨거운 청주 맛을 잊을 수는 없다.
청주만 데워 마시는 게 아니다. 삼국사기에는 막걸리가 미온주라고 소개되어 있다. 은근하게 데워진 막걸리는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차게 마시는 막걸리가 가슴 후련한 탄성을 유발한다면 미온주로 마시는 막걸리는 음~하는 복성의 감탄사를 자아낸다. 어느 쪽이든 막걸리는 강퍅한 인심을 허무는 술이다. 세상의 어떤 술이 생면부지의 길손을 불러 앉히는가 말이다. 막걸리 한 잔 하고 가라는 인사는 하마 인연을 부르는 일, 예삿일이 아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알맞은 술이 막걸리다. 살아갈수록 모나고 까다로운 사람을 멀리하게 된다. 남 헐뜯는 소리도 듣기 싫고 가십에도 흥미가 떨어진다. 품는 재주가 없으면 뱉기를 삼가면 되지만 부족한 덕으로는 그것이 쉽지 않다. 품 넓고 온기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 인생의 소임을 다하고 싶다.
막걸리는 태생적으로 순하고 털털하다. 마구 걸러 마신다는 것은 어지간한 분노는 쉽게 다스린다는 뜻이고 면밀히 계량하지 않고도 술맛을 낸다는 건 까탈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막걸리의 이치를 따른다면 세상에 시비할 일이 무엇일까. 역사적이나 훈고적이지 않고 현실적이지만 사람을 비굴하게 하지 않는 술이 막걸리다. 잔이 비워질 때까지 익어가는 술. 그 거듭되는 숙성의 기품을, 미완인 채로도 넉넉한 품성을 좇고 싶은 것이다.
<더 수필, 2021 빛나는 수필가 60인 선정작> , <2020 선수필 재수록> , <2020 한국산문 6월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