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진 이성숙 Jul 12. 2023

약간의 불통

말을 삼가면 관계는 고요해진다

한국번역원 「너머」

                     약간의 불통  

                                                                  

 사위는 중국 사람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2세라 생활방식과 사고는 모두 미국식, 어쩌면 그는 미국인이다. 나와 사위는 다른 언어를 쓴다. 그는 영어로 말하고 나는 한국말을 하는 희한한 대화가 오간다. 나는 영어가 서툴고 그는 한국어를 배우는 중이니 누가 중간에서 통역해 주기 전에는 서로의 문장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당연히 피차간 대충 알아듣는다. 그러나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는 그리 불편하지 않다.

 말이 채우지 못한 공간에는 배려가 들어찬다. 우리는 상대의 말이 아니라 표정이나 눈빛에 집중하고 사소한 몸짓에도 귀 기울인다. 심리학에서는 입술이 하는 말보다 몸이 하는 말(body language)을 귀하게 친다. 입술은 가식을 전할 수 있지만 무심결에 나오는 몸짓은 진실을 드러내는 까닭이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다른 곳을 쳐다보거나 괜찮다고 말하면서 손을 자꾸 만지작거리면 우리는 그가 하는 말보다 그의 시선이나 손의 움직임에 더 신경 쓰인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사랑 고백이 거짓임을, 그의 괜찮다는 언어가 괜찮지 않음을 알게 된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말이 없는 공간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말이 없는 공간은 의외로 따듯하고 편안하다. 우리는 그의 말을 듣는 대신 그의 눈을 보고 그의 제스처를 읽는다. 그것은 말보다 진실되고 섬세하다. 불평이 있어도 섣불리 뱉어내는 말보다 뭉근히 드러나는 몸의 언어는 덜 냉소적이다.

 말을 삼가다 보면 관계는 고요해진다. 나와 사위를 연결하는 딸은, 우스개인지 심중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엄마가 영어를 못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라고. 엄마가 사위와 말이 잘 통했으면 잔소리를 늘어놨을 거라는 얘기다.

 언젠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비비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백인 할머니와 나란히 앉았던 적이 있다. 우리는 자연스레 성장한 자녀 얘기를 나누었고, 딸이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여서 나는 사위와 말이 안 통해 걱정이라는 푸념을 내놓았다. 내 얘기를 들은 비비안은 인생에 귀감이 될 만한 얘길 해 준다.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잔소리는 ‘걱정’이 근원이라는 말씀, 자신이 살면서 겪은 고초를 자녀가 겪지 않게 하고 싶은 소망이 잔소리가 된다는 게다. 결국, 사위와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한 마음은 ‘덕담을 건넬 요량’이 아니라 사위에게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 못하기 때문’ 아니냐는 추궁이다. 나는 그의 말을 모두 부정하지는 못한다. 과연 그렇지 않은가.

 좋은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어도 좋다. 내 요구를 관철시켜야 할 때, 불평을 터뜨리고 싶을 때, 나를 이해해 달라고 항변해야 할 때, 뭔가를 지시하고 싶을 때 우리에겐 말이 몹시 필요하다. 그런 말에는 독이 묻어 있기 십상이다. 그의 뜻대로 두고, 불평하지 않기로 하고, 내가 이해받으려 하기 전에 상대를 먼저 이해해 주고, 내가 그를 위해 먼저 나서려고 한다면 말이 없는 공간은 이심전심 사랑으로 채워진다. 성경 잠언에 이런 말이 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 그릇이 얕은 나로서는 입술을 통제할 능력이 없으니 말을 못 하는 게 차라리 믿음직하다.

 

 실수나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는 것은 젊은 인생에 주어진 특권이다. 자녀가 실패할까 두려워 그의 삶에 훈수를 두는 것은 그가 누릴 인생의 ‘몫’을 빼앗는 일이 될지 모른다. 돌아보면 나 역시 많고 많은 실수 위에 서 있지 않은가. 다치고 일어서면서 이만큼 ‘되어’ 있다. 인생은 제각각 자신의 몫이 있다는 비비안의 얘기가 따듯한 물줄기처럼 내 안으로 흐른다. 비비안은 사위에게 말을 하려고 애쓰는 대신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라고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라고. 대화는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고.

 사위는 음식을 권하는 내 마음을 잘 읽어내고, 나는 내 표정을 살뜰히 살피는 그의 마음이 이해되어 우리는 만날 때마다 반갑다. 불통의 선물이다.

 이민 1세 부모와 2세 자녀와의 불협화음은 동일 문화권의 부모 자녀가 겪는 갈등보다 심하다. 한국말을 알아듣는 자녀라 해도 타 문화권에서 자라난 자녀와 여전히 한국적인 부모 사이에는 갈등이 도사린다. 모든 걸 말로 다잡겠다 생각하는 순간 사랑하는 관계는 파탄을 맞는다.

 불통을 순순히 받아들이면 건강한 거리 두기가 가능하다. ‘건강한 거리’야말로 관계의 묘약. 사위를 내 편 되게 하는 것은 약간의 불통일 따름이다.(*)(한국번역원 웹진 <너머> 22년 11월 창간호)


작가의 이전글 여행 같은 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