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봉지의 무게

생의고백

약봉지의 무게


식탁 위 하얀 봉투는 비어가는 몸이 써 내려간

간절한 답장이다.


알약 몇 알에 실린 것은 통증의 숫자가 아니라

"하루 더 당신 곁에 머물고 싶다"는 무거운 생의 고백.


버리지 못한 낡은 봉투마다 혼자 견딘 새벽의 서늘한 습기가

바스락거리며 쌓여 있다.


-----------에세이-----------

복지 현장에서 어르신 댁을 방문하면 식탁 위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물컵, 리모컨, 그리고 약봉지입니다.

날짜와 약국 이름이 찍힌 하얀 봉투들이 한두 장이 아니라 서랍과 비닐봉투 속에서 계속 나옵니다.

어떤 봉투는 깔끔하게 접혀 있고, 어떤 봉투는 손때가 묻어 구겨져 있습니다.

종이는 가볍지만 어르신이 약봉지를 꺼내는 손길은 늘 조심스럽습니다.

마치 그 봉투가 ‘건강’ 그 자체인 것처럼요.


어느 날 한 어르신께서는 작은 상자 하나를 보여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버리면 안 돼. 혹시 모르잖아.”

그 상자 안에는 복용 시기가 지난 약봉지들이 섞여 있었고, 같은 성분의 약이 이름만 달리 중복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제가 “정리해 드릴까요?” 하고 조심스레 여쭈었지만, 어르신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동안 봉투를 손에서 놓지 못하셨습니다.

그 손의 망설임은 단순히 ‘정리하기 귀찮다’가 아니라 ‘없어질까 봐’였습니다.

약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다고 믿는 마지막 끈이 끊어질까 봐 손을 떼지 못하신 것이지요.


어르신들이 약을 남겨두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병원이 멀어 다니기 어려울 때, 약이 너무 많아 헷갈릴 때, 부작용이 두려워 중간에 끊을 때,

혹은 “이 정도는 참아보자” 하고 스스로 버텨볼 때 등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어르신들 입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바로 “아까워서.” 약값이 아까운 것이기도 하고, 병원 다녀온 하루가 아까운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받아온 건데…”라는 마음이 아까워서입니다.

결국 약봉지는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버텨온 시간의 영수증처럼 남는 셈입니다.


그날 저는 상자를 비우는 대신 “다시 쓰는 방식”으로 정리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우선 최근 한 달 치 약봉지만 따로 모으고, 나머지는 유효기간과 복용 여부를 하나씩 확인했습니다.

같은 약이 겹치는 것은 약사와 상의해야 하므로 따로 분리했고,

날짜가 오래된 봉투들은 폐기용 봉투에 담았습니다.

정리하는 동안 어르신은 옆에서 봉투를 하나씩 펴보며 중얼거리셨습니다.

“이건 나 아팠을 때 받은 거고… 이건 다리가 쑤실 때….” 약을 확인하시는 모습이 아니라,

자기 몸의 연대기를 읽는 표정이었습니다.


정리를 마치고 나자 어르신은 한동안 말씀이 없었습니다.

제가 “약을 버리는 게 아니라 헷갈림을 줄이는 거예요. 필요한 약은 다시 처방받으시면 돼요” 하고

설명드렸더니, 어르신이 작게 한마디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놓으니 마음이 좀 놓이네.” 그 말은 ‘이제 상자가 가벼워졌다’라기보다 ‘불안이 한결 정리되었다’에 가까웠습니다.


약봉지의 무게는 종이 몇 장의 무게가 아니라, 매일매일을 혼자 책임져 온 사람의 무게임을

그날 다시 깨달았습니다.


현장에서 저는 약을 ‘관리’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안심’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약봉지가 산더미처럼 쌓인 집에는

대개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함께 약을 살펴주는 이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약은 혼자 견디라고 주는 게 아니라, 같이 살자고 주는 거예요.” 약봉지를 정리하는 일은 결국 어르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확인이기도 하니까요.


※ 이 글은 복지 현장에서 얻은 인상을 바탕으로 하되, 특정 개인·기관이 식별되지 않도록 장면과 표현을 재구성했으며 개인정보는 모두 배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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