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Part 1. 워홀러 이야기 ③

외국인과 일하기(Fabcor, Linberg construction)

by 임성모 Sungmo Lim

외국인과 일하기 Fabcor Ltd.


SIN 이 있어야 캐나다에서 일을 할 수가 있다

Dawson creek은 시골 주제에 모텔이 꽤나 많았다. 한국 모텔촌과의 차이라면 손님의 대부분이 워커였다. 캐나다의 북쪽은 기름이 많이 발견되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일이 자연스럽게 발달하였으며, 도슨 크릭 역시 겨울을 전후로 일꾼들이 모여드는 기름 도시 중 한 곳이었다.


기름을 찾고 땅을 파는 일, 기름을 모아놓을 플랜트를 짓는 일, 두 지역을 파이프로 연결하는 일, 이들을 보호하는 메딕, 감시하는 인스펙터들이 그들이다.


우리 모텔의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과 같이 일하고 싶었다. Joe라는 캐내디언은 106호에 머문 지 꽤 오래된, 백발, 장발의 붉은색 얼굴을 가진 인디언 이었다. 스스로를 히피라고 했다.


요즘 많이 바빠? 우리, 너랑 같이 일하고 싶어. 우리도 할 수 있어?

응. 너네도 할 수 있어. First aid와 H2S Alive 티켓 두 장만 있으면 돼. 일은 진짜 쉬워


곧 성수기의 시작이었다. 동네가 워낙 바쁜데 반해 인력이 상당히 부족했기에 구인하는 곳이 많았다. 사장님과 상의를 하였다. 정도 많이 들었지만 언제까지고 외국에 나와 한인 밑에서 일할 수는 없었다. 사장님은 우리의 도전을 응원해줬다. 하지만 동네에서는 이미 ‘워킹홀 리데이비자 주제에 너네가 무슨 그런 일을 한다고’라는 기운을 심심찮게 느낄 수 있었다.


모텔 근무에 지장이 없도록 서로 번갈아가며 교육을 받았고, 결국 티켓을 취득했다. Joe에게 레주메를 주었고, 그 다음날 바로 출근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모텔 업무 인수인계도 못할 상황이 되었다.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이틀 후부터 Joe와 함께 출근을 했고, 집도 나와야 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언 급하겠다.)



죠와 함께 우리의 직책은 Labourer. 오일이 관통하는 파이프를 땅에 묻게 되는데, 이로 인해 훼손된 농장을 농부에게 다시 돌려주기 위해 거름 진 땅으로 만드는 일을 하게 된다. 끌개부터 밥캣까지 동원하여 나뭇가지며 돌 등을 걸러내어 트레일러에 싣고, 한 곳에 모아 놓은 뒤 불로 태웠다. 우린 주로 Jordan과 함께 세 명이서 팀을 이뤄 일을 하였다. 조단은 밥캣과 트레일러를 운전하는 방법도 가르쳐줬다.


현장에서 폭발 및 화재에 대비하여 오일워커들은 방염복을 입는다



Fabcor 야드의 새벽

매일 6:30. 각 팀의 차 들이 모여서 차 안에서 창문만 열어놓고 미팅을 한다. 춥다. 하루 10시간만 일하면 30만 원 이상 버는 Labourer. 이렇게 지내다가 한국 가면 어떻게 사나. 우리 선임 91년생 Jordan은 35살에 은퇴를 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레드페이스 죠


죠가 여자친구랑 문자를 하는동안 조단이 대신 운전대를 잡아준다




조단은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친절히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해줬다.



묻어야할 파이프들



미녀는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요염하게 휴식을 취하는 죠


자다가 오줌을 지린다면 이왕이면 남미지도였으면 좋겠다


쉬는시간 조단과 동전따먹기 하는 진호



직경 20인치, 20M길이의 파이프들을 2M 깊이로 묻는다


오일 워커로서의 장점은 역시 돈이다. 평일에 보통 12시간 일을 하게 되는데 8시간 이후로는 시급 1.5배의 오버페이를 받는다. 토요일은 기본 1.5배, 휴일에는 2배. 그리고 출퇴근에 소요되는 트래픽 페이와 subsistence를 보장한다. 근무지가 집에서 50km 이상 떨어져 있을 경우 출퇴근에 부담이 되기 때문에 숙식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돈을 주는 것이다. 출근 후 비가 와서 바로 퇴근을 해도 준다. 즉, 얼굴 도장만 찍으면 된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땐 주소를 잘못 적는 바람에 좀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엔 우리도 sub을 매일 130불 정도 받았다. 집이 대한민국이니까.


돈이야 나름 잘 벌었지만 생활은 거의 시체. 5시에 일어나면 대충 씻고, 라면을 먹고, 도시락으로 샌드위치를 싼 뒤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하면 다음 날 점심 장을 보거나, 미리 봐 뒀으면 그대로 씻고 잔다.


기름을 얻기 위해 땅을 뒤집고, 파고, 다시 덮어 주고. 지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만 인식하면, 우리의 후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알고 행동하게 된다는 가슴속에 담고 있던 생각이 무색하리만치 나는 자연과 더불어 살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의 일이 파괴든 발전이든 재생이든 천천히 하라며 길을 막는 소떼들



외국인과 일하기 2. Lindberg construction


역시 도슨 크릭에 있는 건설 회사로써, 주 업무는 오일 플랜트를 짓기 전 바닥 기초 공사를 하는 곳이다. 카펜터와 철근 시공팀, 그리고 레이보러로 나뉜다.


무작정 레쥬메를 들고 찾아갔다. 영석이가 이미 취직이 된 상태였고, 자신감도 있었다. 역시 내일부터 당장 출근하라고 한다. 하루는 일이 끝나고 퇴근하는 길에 옆을 지나가는 청년에게 Andy가 말을 건다. ‘일 구했어? 관심 있으면 우리 회사로 와’ 하면서 명함을 건네준다. 뭐, 이런 동네다. 겨울이 찾아오면 도슨 크릭뿐만 아니라 주변의 중소 도시들은 인력난 에 시달린다. 신문에는 일에 필요한 티켓 비용을 지원해 줄 테니 제발 와달라는 광고가 즐비하다.


Carpenter asistant로서 일을 했다. 귀국 전 망치질이라도 배우고 싶었다. 물론 그 전에 필요한 티켓 하나를 마저 취득을 하였다. 현장이 막 끝났는지 야드 정리가 하나도 안되어 있었다. 영석이와 둘이서 야드를 말끔히 청소하고 정리 정돈하였다. 새 현장에 투입하기 위해 거푸집을 일일이 손 망치로 만든다. 현장에서는 주로 정리정돈과 바닥을 다지는 콤팩트 등 진동기계를 운전했다. Fabcor와 같은 subsistence는 없었지만 충분한 오버타임이 있었다.


Christmas와 New year를 앞두고 파티가 있었다. 동네의 Bar 일부분을 빌려서 진행되었다. 파티의 초대장과 함께 공지된 내용에는, 20불 이하의 선물을 포장하여 갖고 와서 교환하는 순서가 있었다. 나는 동료들이 일할 때 필요한 장갑을 포장해 갔다. 룸메이트와 동네 친구들도 파티를 함께 했다. 갖고 온 선물들은 한 곳에 모아졌다. 곧 이름을 추첨하여 선물을 갖고 가는 이벤트가 시작됐다. 한 동료가 뽑은 그럴듯한 상자 안에는 기다란 상자가 여섯 개 정도 계속 나오더니 마지막에는 저스틴 비버의 브로마이드가 나왔다. 다른 친구는 엄청 큰 박스를 뽑았는데 안에는 MAX 잡지가 있었다.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 내 차례가 되었다. 긴 상자가 끌렸다. 왠지 술이 들어 있을 것 같았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열어 본 상자의 내용물은 고양이 밥 통조림. 고양이 밥을 포장한 친구가 나타나 장난이라며, 술이 진짜 선물이라고 보드카를 줬다. 나이스!!!



Lindberg에서 일하기 위해 추가적으로 따야 했던 PST(Petroleum safety training). 레슨 당 하나라도 틀리면 저렇게 썩소를 날린다. 영상을 다시 보고 문제들을 완벽히 풀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시험을 성공적으로 마친 친구들이 자격증 앞에 줄을 섰다. 자신의 이름을 적는 일만 남았다. 내 차례가 됐고, 내 이름은 Terry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자격증에 Terry라고 적으려다가 이게 내 진짜 이름이냐고 되 물었다.


“사실은 성모가 내 진짜 이름인데, 너희들이 한국인이 아니라서 발음을 잘 못해. 그래서 그냥 Terry라고 사용해. ”


“뭐가 문제야. 네가 연습시키면 되잖아. ”


“......”


타국에서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배우려는 자세는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나 자신까지 변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선생님은 썽무~ 썽무~라고 연습하다가 멋쩍은 듯 웃음을 지으며, 나의 리얼 네임을 적어 주셨다. 이후 남은 캐나다 생활과 남미를 여행하는 내내 성모라는 내 진짜 이름을 계속 사용했다. 물론 앞으로 다시 해외에 나갈 일이 생겨도 그럴 것이다.


새로운 현장에 투입이 되면 인스펙터에 의해 안전교육을 받으며, 교육 수료에 대한 확인으로 스티커를 받는다. 스티커는 짬의 상징.




바닥이 꽁꽁 언 겨울이 되어서야 이곳은 성수기를 맞는다. 그래야 각 종 대형 장비가 현장에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랜트를 건설하는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바닥을 녹여서 동결심도 이상을 파낸 다음에 전동기계로 다지는 일부터 시작하게 된다. 그래서 현장은 항상 진흙 밭이다. 영하 100도의 날씨에도 체온을 유지시켜주는 작업화가 천근 만근이다.


Lindberg에서 내 목수 인생에서의 첫 번째 툴 벨트를 갖게 되었다. 세상에 직업이 2만 개가 넘는다는데 그중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복잡하고 중요한 문제일수록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의식주이다. 그중 신체가 건강한 사람은 몸을 쓰는 일을 해야 한다라는 내 가치관에 따라 집을 짓는 일을 선택했다. 이왕이면 친환견 목조주택. 몸이 건강하다는 것은 축복 아닌가? 막일이라 불리는 육체노동이 못 배운 사람들이 한다는 편견이 싫었다. 건축계에 있는 수많은 기능인 선배님들도 좀 더 체계적으로 국가의 관리를 받을 필요가 있다. 물론 그에 앞서 막일을 대하는 국민 의식의 변화도 필요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렇게 시작은 할 수 있다. 티끌만큼의 티도 나지 않는 내 존재와 행동들이지만 정치인이나 기타 공인이 아닌 이상에야 현장에서 기능인을 꿈꾸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게 최선이다 라는 게 내 결론이었다. 물론 공부 못하고 멍청해서 목수 됐다는 소리 듣기 싫으면 자기계발에도 충실해야 한다. 관련 책을 항상 곁에 두고, 최신 소프트웨어를 현장에 활용하여 시대에도 뒤떨어지지 말아야 하고, 무엇보다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건강 관리에도 힘써야 한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역할이 있는 것이니까. 가끔은 작업복 차림으로 도서관에 드나드는 캐나다 문화가 부럽기도 하다. 그들에 대한 주변의 시선은 지저분한 차림에 대해 인상을 쓰기보다는 ‘어떤 기술을 가졌겠구나’, ‘돈을 엄청 버는 사람이겠구나’ 등이다. 많이 버는 게 크게 부럽지는 않지만 뭐.


무엇보다도 아버지처럼 고생하지 말라는 당신의 수십 년 목수 인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



내 인생 첫번째 툴벨트
keyword
이전 02화Part 1. 워홀러 이야기 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