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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워홀러 이야기 ④

집 구하기

by 임성모 Sungmo Lim

집 구하기


Dawson creek 에는 우리 엄마 아빠 세대의 한인들이 꽤 있었고, 동네 대부분의 모텔을 소유하고 있었다. 돈이 되는 곳에는 꼭 한인이 있다. 이 동네에 오는 워홀러들은 대부분 모텔의 하우스키퍼 혹은 프론 데스크에서 일하며, 숙식을 무료로 제공받는다. 북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지라 다들 오기 꺼려하기에 나름 직원의 복지를 생각하시는 사장님들의 업체 운영 방식인 것 같다.


우리도 처음엔 마찬가지였지만, 오일 워커로 일하며 결국에는 모텔을 이용하는 손님으로 입장이 180도 바뀌었다. 개척자가 된 기분이었다. 사장님은 겉으로는 응원하셨지만, '한인 사회 밖으로 나가서 고생 한 번 해봐라'라는 식의 얘기를 여기저기 했다고 한다.


Fobcor 로의 첫 출근 전 날. 짐작은 했지만 역시나 자기가 운영하는 모텔에는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곱게 키운 딸을 어렵게 시집보냈는데 손 닫는 곳에 있으니 신경 쓰인다나 어쩐다나. 그는 이 동네의 한인들 중 나이가 제일 많지는 않지만, 동네에서 꽤 영향력 있는, 영화 '이끼'의 이장 같은 존재였다. 그 말은 즉슨 이 동네의 다른 한인 모텔에서도 지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다른 모텔을 운영하시는 어른들은 우리를 응원하면서도 쉽게 도움의 손을 내밀어 주시지는 못했다. 물론 여기저기 방을 알아봐주시고 도움을 주신 분들도 계셨다. 하지만 한인 모텔에서 지내고 말고를 떠나 오일 성수기를 맞은 이 동네는 십 수개가 넘는 모텔을 통 틀어 빈 방이 없었다. 렌트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던가. 정말 다행히도 외국인 모텔의 하우스키퍼로 일하는 친구의 도움으로 일박, 그리고 이모님이라 불렀던,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모텔 중 하나를 책임 지고 계신 할머님의 도움으로 '몰래' 하루를 더 보냈다. 하지만 계속해서 우리를 재워주거나 도와주는 일은 한인 사회에서 '이장'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 친구와 이모님에게 계속 부담을 줄 수는 없었다.


이모님이 우리를 위해 방을 알아보려고 여기저기 전화 한 곳 중, 우연히 한인 교포 2세가 운영하는 모텔에 예약된 손님이 캔슬을 하는 바람에 빈방이 생겼다고 이모님께 연락이 왔고, 우리는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모텔의 사장님은 한인들과 교류가 많지 않았다. 한국 말이 서툰, 주변 한인의 도움을 크게 필요로 하지 않는 캐나다인이라서 그런 것 같다. 모텔은 베이컨, 과일, 우유 등의 조식이 무료로 제공되었고, 우리를 딱하게 봐주어 비용도 조금 할인해 주었다. 그렇지만 역시 집 나오면 고생이라고 나가는 돈이 만만치 않았다. 모텔에서 지내는 두 달 동안에는 퇴근 후 지역 신문, 페이 스북 커뮤니티, 그리고 각 종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해서 real estate 코너를 수시로 봤다. 혹시나 광고를 올리지 않고 'sale' 혹은 'rent' 푯말을 집 앞에 꽂아놓은 사람들도 있을까 봐 동네를 수 십 바퀴 돌아다녔다. 가끔씩 뜨는 광고를 보고 찾아 간 집은 환경에 비해 방 값을 너무 터무니없게 불렀다. 오일 워커들이 sub을 받는 걸 다 아는 듯 그에 맞춘 가격들을 제시했다.


'오늘도 허탕이구나'하며 자전거를 돌려세우던 어느 날, 못 보던 타운하우스가 눈에 띄었다. 늦은 시간이라 번호만 저장해두고 다음 날 전화를 했는데, 일주일 안에 입주할 수 있다고 하였다. 방이 세 개 있는 2층 집에 월 1,300불 이었다. 디파짓도 없었다. 이곳에서 만난 동생까지 총 세 명이 살려고 했는데 딱 이었다. 일주일 후 입주를 했고, 여러 지인들의 도움으로 소파, 식기류, 침구류 등을 얻었다. 그리고 이 곳은 곧 도슨 크릭 한인 청년들의 아지트가 됐다. 집 에는 항상 3L 보드카가 준비되어 있었다. 우연히 만난 오일필드의 한인 드릴러와 다른 모텔에서 일하는 친구들, 그리고 초밥 집 친구와 형들이 수시로 다녀갔다. 그중 영석이라는 친구는 모텔에서의 일을 접고 나와서 우리 집에 들어왔고, Lindberg에서 나와 함께, 내가 귀국한 후에도 계속해서 일을 했다.


Willowview townhouses


눈이 왔다. 자전거를 미쳐 들여놓지 못했다ㅜ 저 자전거로 남미를 여행해야하는데


출근 전 막간


하루에 8시간 자고, 8시간 일하고, 출퇴근길 1시간에 밥, 세면 등 기타 생리적 활동으로 3시간 정도 소요되면, 하루 24시간 중 4시간이 남는다. 인간은 언제쯤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오전만 일하면서 살고 싶다.





2012년 1월 23일. 나는 지금 초 긴장상태이다. 오토바이 사고로 긴장하거나 피곤해지면 뻣뻣해지는 목과, 두통이 이를 더 극대화시킨다. 요 며칠, 내가 캐나다에 있어야 되는 이유에 대해 수 십 번도 더 생각해봤다.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여행을, 한국을 조금 더 빨리 가게 될 것 같다. 모든 사람들, 순간들이 아름다웠고 아쉽지만, 파티엔 언제나 마지막 음악이 필요하니까. 모두들 각자의 스텝을 멈추지 말아요. 1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꽃을 피워요 우리.




무작정 많이 보고, 많이 읽으며, 많이 경험하면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머리가 수용을 못한다. 진심으로 느끼고 깨달아야 경험이고, 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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