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에 매뉴얼 같은 건 없다. 그저 부딪혀보는 것 밖엔.
"우리 사귈래?"
Y에게 쪽지를 받고 '사귀는 게 뭐지?'라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어쨌거나 14살의 나는 처음으로 연애라는 걸 했다. Y는 이영도의 소설을 좋아했고 너바나를 즐겨 듣는 또래에 비해 조숙한 소년이었다.
당시 중학생의 연애는 같이 등하교하는 것, 하교 후에 메신저(그때는 '타키'였다)로 수다떠는 것, 100일단위의 기념일이 되면 이만원정도를 지갑에 넣고 시내에 나가서 영화를 한 편 보고 햄버거를 사먹는 것 정도였다. '연애 시작 요이땅!'을 하긴했지만 평범한 나날이었고 함께 있으면 재밌는 친한 친구가 생긴 것 외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우리 헤어지자"
너무 평범해서였을까, 공식적인 연인 사이로 한 해를 함께 보내고 그 이듬 해 봄 우리는 헤어졌다. 아니 정확히는 차였다. (그것도 메일로!)
지금 생각해보면 채 두 해를 못 넘긴 짧은 기간이었지만 당시 사귄지 22일이 되면 '투투'라며 친구들에게 공식적으로 200원씩 삥(?)을 뜯을 수 있었던 문화를 생각하면 꽤나 장수커플이었던 셈이다.
감정의 정체도 모르고 첫 연애라는 것을 시작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첫 이별의 징조와 후폭풍은 명백했다. 아직도 나는 내가 왜 차였는지 모르겠지만 여튼 차였고, 차이기 직전까지 클리셰처럼 쓰이는 이별의 전조를 모두 경험했다. 단순했다. 줄어든 연락, 차가운 말투 같은 것들.
덕분에 나는 '침대 밑에서 네가 신던 양말을, 책상서랍에서 네가 먹던 감기약을 발견했어' 같은 농밀한 어른의 정서를 불과 16살에 알아버렸다. 엄마한테 천원 이천원을 구걸해서 충전한 '알'로 한 달에 몇 백통씩 문자를 주고받다가, 헤어진 뒤에 남아도는 알을 친구들에게 나눠주던 날, 나는 많이 울었다. 유난스러울 것도 없이 옆자리를 조금 그리고 잠시 내준 것 뿐이었는데, 이별은 너무도 유난스럽게 찾아왔다.
첫 이별 후로도 이별은 새롭고 의외의 양상으로 그때그때 모습을 바꾸어 찾아왔다. 어떤 이별은 만남보다도 더 자연스럽게 지나갔고, 어떤 이별은 기다려지기까지 했고, 또 어떤 이별은 지레 겁먹었지만 의외로 쉽게 지나갔고, 어떤 이별은 지옥같았다.
이별의 대상과 방법과 이유도 갈수록 다양해졌다. 처음 사귄 남자친구에게 (메일로!) 차이는 것으로 시작해서, 친한 친구가 전학을 가거나, 내가 지구 반대편으로 유학을 가거나, 어딘가에서 어떤이유로 친해졌던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멀어지거나 하는 식이었다. '세상에는 난이도 1에서 100까지의 이별이 있는걸까?' 싶을 정도로 모든 이별은 새로웠고 생각보다 자주 찾아왔다.
그러나 난이도와 상관없이 쉬운 이별은 쉬운대로, 어려운 이별은 어려운대로 저마다의 생채기를 남겼다. 그것은 때론 미안함과 죄책감, 때론 배신감과 분노, 때론 무너짐과 막막함이었다. 그렇게 크고작은 몇 번의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며 어느 정도는 반복되는 그 감정의 소용돌이 안에서 견딜 수 있을 만큼만 휩쓸리는 법을 겨우겨우 배웠다.
하지만 한 달 내내 매달려서 최종보스인줄 알았던 거북왕을 물리치자마자 왕거북왕이 등장하고, 또다시 한 달을 매달려 왕거북왕을 물리치자마자 너구리왕이 등장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도 동시에 배웠다. 내가 거북왕을 무찌르기 위해 획득한 스킬은 왕거북왕에게는 혹은 너구리왕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매번 모습과 난이도를 바꿔 랜덤으로 찾아오는 이별에 매뉴얼 같은 건 없다. 그저 한 달이든 두 달이든 이리저리 부딪혀보는 것 밖에는.
그간의 크고 작은 이별이 내게 알려준 게 하나 더 있다.
이별하고 나서야 그 관계가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가 명확해진다는 사실이다. 한 걸음 정도 물러나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내가 지금 오르고 있는 산의 능선과 색깔을 한 눈에 보려면 한참을 오르고 나서 뒤돌아보아야 하듯 말이다. 처음 겪는 감정에 몸살을 앓던 14살의 내게, '네가 한 건 연애였어. 넌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게 사랑이라는거야!'울면서 꾸역꾸역 산을 오르던 내게, 이별은 그렇게 알려주고 있었다.
PS
아, 또하나 이별이 알려준 것이 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인데 Y는 사실 엄청난 바람둥이였다! 나를 사귀는 동안에 나를 핑계로 내 친구들과 가깝게 지냈고 나와 헤어지고나서도 내 친구 서너명과 사귀었다고 한다. 첫 이별에게 아직까지도 가장 고맙게 생각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