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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웅 Aug 22. 2022

왜 너는 슬픈 글만 써?

천 개의 슬픔을 다 쓰면

고향에 있는 엄마는 서울 사는 내게 자주 전화를 한다.

엄마는 주로 내 안위를 걱정하고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묻지 않는 편인데 하루는 그런 질문을 했다.

왜 슬픈 글만 쓰느냐고.

딸이 행복했으면 싶은데 슬픈 일들을 많이 다루니까 내심 속상했나 보다.

나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워서 “세상에 슬픔이 널렸으니까 그렇지 뭐”라고 답했다.

“쓰는 네가 슬플까 봐 그런다. 행복한 글을 쓰면 안 돼?”

엄마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다.


글쎄, 천 개의 슬픔을 기록하고 나면 하나 정도는 행복에 대해서 쓸 수 있을지도 몰라.



나도 내가 어떤 마음인지 잘 모르는 채로 아리송한 말을 했다.

엄마는 단번에 알아듣고는 “혼자만 행복할 수는 없다는 말이구나”라고 따뜻하게 이해해주었다.

그리고는 나지막하게 “잘 자랐네”라고 속삭였다.

세계 각국에서 연일 슬픈 소식이 들려오는 요즘, 그 말이 자주 생각난다.

감히 가늠해보기도 어려운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내게 닥친 불행에서 나는 무엇이라도 배우려 한다. 어차피 겪게 된 고통이 나를 완전히 파괴할 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어떻게든 긍정할만한 부분을 찾아내고 나를 성장시켰다고 믿으려 애쓴다.


반면 타인의 고통 앞에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려 한다. 아주 사소한 것도 깨닫지 않으려 노력한다. 타인의 불행에서 나의 평안을 확인하지 않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윤리다.


타인의 슬픔에 충실하기란 너무나도 어렵다. 진심으로 공감한다고 해도 당사자만큼 아프지는 않을 테니까. 그저 함부로 그들의 슬픔을 재단하거나 나에게로 굴절시키지 않고 같이 아파하며 적어 기억하려 하고 있다.


아무것도 도울 수 없어 무력감에 잠식되는 날에도 엄마의 말은 나를 길어 올린다.

슬픔을 외면하지 않는 딸은 엄마의 자랑이고, 세상의 슬픔을 머금은 글은 나의 행복이다.

정서는 태도를, 태도는 행동을 변화시킨다. 슬픔은 강하지 않지만 오래도록 축축하게 살아남아 세상을 조금씩 바꿀 것이다.

그것이 내게는 아주 작은, 그러나 결코 사그라지지 않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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