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귄다는 소문이 퍼지고 과 선배들이 나에게 하는 첫 질문이 열에 아홉은 이랬다. 이유인즉슨 우리 남편의 머리숱 때문이었다. 한가닥 한가닥이 소중해져 가는 100만 불짜리라 불리는 남편의 곱슬거리고 갈색빛의 머리카락이 괜찮냐는 것이다. 내 눈의 콩깍지가 단단히 쓰여 있었기 때문인지 그다지 머리숱이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 창 취직을 준비 중인 때였지만, 그깟 머리숱쯤은 문젯거리로 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많은 취준생들이 면접을 위해 성형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그 중요한 시점에도 말이다.
결혼을 하기 위한 웨딩촬영 날에도, 결혼식 당일에도 신랑님의 머리를 어찌하지 못하는 헤어 메이크업 담당자들을 대신해 신부인 내가 직접 구입한 흑채를 뿌려주었다. 한참 박명수 님이 선전하던 그 흑채를 신랑의 갈색 머리색에 맞는 것으로 고르고 꼼꼼하게 뿌렸다. 그리고 스프레이로 고정했다.
결혼식 당일엔 흑채와 관련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신부가 신랑의 흑채를 직접 뿌려주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니, 웨딩 메이크업을 담당해 주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웃기는 이야기로 떠돌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남편의 100만 불짜리 머리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가 참 많다. 몇 번을 남편과 이야기해도 배꼽 잡고 웃는 그 에피소드 몇 가지를 털어놓아볼까 한다. 여기에 글을 쓰는 것보단 두시탈출 컬투쇼에 보내보면 당첨확률 100% 일 것 같으나, 남편의 체면을 생각해 여기에 끄적여본다.
에피소드 1
신입사원 시절, 부서 회식으로 부장님들과 회식을 가면 남편은 항상 부장님이 언짢아야 하는 타이밍에 자신의 기분이 안 좋아지곤 했다고 한다. 이유는 식당 종업원은 공깃밥을 줘도 부장님보다 옆에 앉은 신입사원에게 먼저 놔준단다. 어른에게 먼저 음식을 건네는 것이 예의인데, 그 식당 종업원은 아마 베트남이나 조선족이 아니었을까? 음식을 시킨 계산서도 카드를 들고 계신 부장님이 아닌 꼭 자기 자리 옆에 놓는다나?
에피소드 2
직업상 공사 관리 감독을 할 때 민원이 많았다고 한다. 한 날은 민원인이 화가 잔뜩 나서 사무실 문을 세게 열고 들어오며 외쳤다.
"여기 팀장 나와"
신입사원으로 제일 문 가까이에 앉아 있던 남편은 벌떡 일어나 민원인을 제지했다. 그러자 그 민원인이 던진 한마디.
작년 결혼기념일은 우리가 결혼한 지 1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거창한 계획을 고민하다 남편에게 선물을 하기로 했다. 바로 모발이식센터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모발 이식과 관련된 정보를 검색하고, 어떤 방법이 남편에게 맞을까 꼼꼼하게 읽어봤다. 그리고 강남에 유명하다는 모발이식센터 두 군데를 예약해두고 하나씩 찾았다.
첫 번째 간 병원에서 신랑은 내가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는지 느꼈을 거라 생각한다.
"선생님, 꼭 자신의 머리카락으로만 가능한 것인가요? 제 것으로는 안 되나요?"
"아내분이 남편분을 정말 사랑하나 봅니다. 모발이식은 자신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하죠."
약을 먹어보고 1년 뒤에나 보자는 선생님은 더 이상 모발 이식에 대한 어떤 방법적인 설명조차 없었다. 잔뜩 기대하고 갔던 우리는 너무나 솔직한 의사 선생님의 처방에 헛웃음만 지으며 나왔다.
일찍 나온 탓에 허기진 배를 달래고 결혼기념일이라고 가로수길도 좀 걷고 보헤미안 랩소디 영화도 한편 보고 두 번째 병원을 찾았다. 이번엔 상담실에 남편 혼자 들어갔다. 첫 병원보다는 조금 더 긴 시간이 걸려서 남편이 나왔다. 수술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지금 상태를 사진으로 찍어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역시, 2~3개월은 약을 먹어보고 결정하자 했다. A급 머리가 너무 없어서 모발 이식을 이대로 하면 머리 전체가 B급 머리카락만 남게 된다나...
이렇게 우리의 10주년 결혼기념일에 남은 거라곤 처방전 두장뿐이다. 결혼식 때는 흑채를 곱게 뿌려주던 나도 이제는 남편의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볼 수 있으니 이제야 그 콩깍지라는 것이 벗겨진 모양이다.
에피소드 4
매번 목욕탕에 있는 이발소에서 군인같이 머리를 바짝 자르던 남편을 내가 다니는 단골 미용실 원장님께 맡기기로 했다. 그 원장님이 직접 커트해주시는 가격은 일반 커트 가격에 비해 비싸지만 그간 원장님의 실력을 보아 믿고 맡겨 보기로 했다. 컷을 위해 조금 지저분해도 머리 자르는 것을 미뤄 평소보다 길어진 길이로 찾아갔다.
원장님은 숙련된 손놀림으로 남편의 머리를 정성스레 다듬어 갔다. 옆머리는 적당히 자르고 숱이 적은 윗 머리는 계속 길러서 나중에 파마를 하자는 처방을 내려주셨다.
윗 머리를 조심스레 가운데로 모아서 스타일을 잡아주시니 한결 풍성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원장님의 손길에 감사를 전하며 계산을 하려는데 원장님께서는 단골손님에게 후한 인심을 쓰듯 커트 가격을 일반가로 해주셨다. 괜찮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가격을 깎아주시면서 원장님도 모르게 진심의 말을 뱉으셨다.
"에이, 괜찮습니다. 모 많이 깍지도 않았는데요."
옆에 있던 다른 선생님과 남편의 눈을 번갈아 바라보던 원장님은 짐짓 자신의 말에 놀라 한 말씀 더 붙이셨다.
"아니, 머리가 별로 없었다는 말이 아니고요..."
나는 그 자리에서 배를 잡고 쓰러질 뻔했다.
우리 남편은 특유의 긍정성과 낙천적인 성격으로 그리 머리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 더 신경 쓰고 가꾸면 조금 더 많은 머리카락을 유지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고단한 사회생활과 완벽함을 닦달하는 와이프와 피곤해도 끊임없이 놀아달라는 아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도 그 힘을 다하고 떨어졌으리라.
그래도 점점 제 나이를 찾아가고 있는 남편을 보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저녁은 오이를 얇게 썰어 얼굴에 붙여줘야겠다. 아직은 주름 하나 없는 팽팽한 얼굴이지만 점점 거무스름해지는 걸 보니 측은지심이 든다.
"자기야. 자기가 제 나이 찾았을 때 나도 그 나이에 맞게 조금 더 넉넉하고 푸근해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