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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애 Aug 14. 2019

정직과 완벽 사이에서 고민했던 아이

그림으로 말하는 아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니 작은 아이가 무언가를 찾고 있다.


"엄마, 오늘 왜 영어책 안 넣어줬어?"


기나긴 3주간의 유치원 방학이 끝나고 개학한 첫날이다. 방학 동안 유치원 영어 수업교재로 REP(Repeated Exposure & Practice, 가정에서의 듣기 활동)를 하고 개학날 다시 보내달라는 통지문의 내용을 잊고 아이를 유치원에 보냈다. 항상 자기 것은 미리미리 잘 챙기는 아이였기에 못 챙겨간 영어책이 마음이 쓰였나 보다. 부랴부랴 영어책을 찾아 가방에 넣어주자 금요일에 있을 물놀이를 대비하여 여벌 옷과 수건도 넣어달라고 당부한다.


"근데 엄마 영어 스티커 왜 하나도 안 붙여줬어?"


방학 동안 REP를 하면 스티커북 해당 날짜에 스티커를 붙여주어야 했다. 워낙 아이의 공부에는 무심한지라 그것 또한 챙겨주지 못한 엄마에게 화살이 쏟아진다. 


"우리 영어 CD 몇 번 들었지? 그만큼 붙여가면 되겠네..."


아이를 달래며 급히 스티커북을 꺼낸다. 하지만 아이의 표정은 좀처럼 좋아지지 않는다. 방학에 집을 비우고 여행을 열흘 정도 다녀왔으니 그간 영어 CD를 들을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집에 있었던 날은 아침에 영어 CD를 틀어 놓고 흥얼거렸던 기억이 있기에 그만큼 스티커를 붙이자 했다.


"세네 개 붙이면 될까?"


아이는 나를 올려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매일매일 영어 공부를 하고 스티커를 붙여가서 선생님께 칭찬을 들었어야 하는 아이다. 오늘 스티커북을 가지고 온 다른 아이의 스티커 개수를 훔쳐봤을 아이다. 자기의 스티커 개수가 자기가 생각하기에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야기했으리라...


잠자리에 들기 전 오랜만에 우리가 보낸 방학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림카드를 꺼냈다. 하지만 아이는 방학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럼 오늘 이야기를 해볼까? 했더니 먼저 카드를 하나 집어 든다. 내가 뽑고 싶었던 카드를 뽑아 든 아이. 나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 다른 카드를 들었다. 


내가 뽑은 카드


"엄마는 오늘 엄마가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방향을 잡느라 힘들었어."


내가 선택한 카드를 보여주며 이야기를 먼저 했다. 이 시간 만큼은 나의 감정에 대해 되도록 솔직하게 아이에게 전달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자 아이는 자신의 카드를 들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이가 뽑은 카드


"나는 영어 REP를 못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시곗바늘처럼 뱅뱅 돌리느라 어지러웠어."


그래도 세네 번 해서 스티커 붙이기로 하지 않았냐는 나의 물음에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REP는 책에 있는 글자를 손으로 집으면서 CD를 따라 듣는 건데, 나는 그냥 듣기만 했잖아."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계속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시무룩해있던 아이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스티커를 하나도 붙여가지 못해서 창피를 당하기는 싫고, 그렇다고 제대로 된 방법으로 과제를 하지 못하고 스티커를 붙이는 건 양심에 찔렸던 것이다. 그 이유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종일 머리를 시곗바늘처럼 뱅글뱅글 돌렸다는 뜻이리라.


정직함과 완벽하지 못해 당할 창피함 사이에서 어지러울 만큼 고민했던 아이의 순진함에 웃음이 나왔다. 나도 아이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에 '그럼 숙제 못한 거네'라고 말해주기는 힘들었다. 그 대신 작게 속삭였다.


"엄마가 정재 마음을 알겠다. 음~~ 우리 열심히 세 번은 들었으니깐 세 개만 붙여가자. 그 대신 여름 방학 우리 열심히 놀았잖아. REP는 이제부터 열심히 하기로 약속하고."


영어 CD를 들었던 날이 언제였는지 달력을 보며 기억을 더듬어 함께 스티커 세 개를 붙였다. 아이는 엉덩이를 쭉 빼고 쑥스러운 종종걸음으로 걸어가 가방에 스티커북을 넣었다. 오늘도 이렇게 엄마는 작은 카드에 기대에 아이의 마음을 엿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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