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아버지가 먼저 한걸음

by 권성선

늦은 밤, 혼자 포차 문을 밀고 들어선 남자가 있었다. 중년의 남자였다. 외투 깃을 한껏 세운 채 조용히 자리에 앉은 그는 말없이 잔을 받았다. 손에 잡힌 작은 술잔 하나가 그에게는 방파제 같았다.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그는 잠시 고요 속에 머물렀다.

고수는 익숙한 손길로 잔을 채우며 조용히 그의 눈빛을 살폈다.

"고등학생 아들이 하나 있어요."

남자가 입을 열었다. 술기운에 젖은 목소리였다.

"요즘은 애랑 말 한 마디 붙이기도 어려워요. 말만 하면 싸움나고, 뭐 하나 물어보면 짜증부터 내고...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모르겠어요.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피하게 돼요."

말을 이어가는 그에게선 피로가 묻어났다. 회사에서는 부하 직원들 눈치 보랴, 나이 어린 상사의 기분 맞추랴 하루 종일 사람들 틈에서 싸우고, 참다가 돌아오면 집에선 아들과 눈치 싸움을 벌여야 했다.

“예전엔 말 잘 듣던 애였는데 말이죠.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건지…”

그 말에 고수는 대답 대신 물수건으로 잔을 닦았다. 그러다 조용히 말했다.

“아드님한테 물어보신 적 있으세요?”

"예? 뭘요?"

"네. 당신 생각 말고, 아드님 마음이 어떤지. 그걸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술잔만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에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딸한테 하는 반만큼만 해봐. 꼭 내가 밖에서 데려온 애 같아. 둘은 왜 붙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지 몰라. 딸은 그렇게 이해하고 예뻐하면서 말이야."

그땐 화가 났다. 아내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말이 맞았다.

나는 한 번도 아들에게 마음을 물어본 적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무엇이 좋고 싫은지… 묻지 않았다.

그저 훈계하고, 잔소리하고, 내 방식대로만 이해시키려 했다.

회사에서는 ‘예’만 반복하며 살았고, 집에서는 생활 이야기만 오갔을 뿐, 마음속 얘기는 단 한 번도 오가지 않았다.

그런 환경에 익숙했던 나는 아버지란 그저 먹이고, 재우고, 시키는 대로 하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아들의 마음을 알 기회는 애초에 없었다.

밥은 먹었는지, 숙제는 했는지, 핸드폰은 그만 보는지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건 마음을 묻는 게 아니었다.

그건 그저 생활을 관리하는 말, 벽에다 던지는 소리였다.

어느 순간부터 아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듣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마음을 묻지 않는 사람에게, 누구도 마음을 열지 않으니까.

그는 잔을 들어 천천히 마셨다. 술맛이 쓸쓸하게 입안을 맴돌았다.

“요즘 아들들은요, 아버지가 불러도 대답 안 하면서 친구들 단톡방 알림엔 바로 답해요. 그쪽이 더 재미있고, 더 중요한 거죠. 하루 종일 거기서 웃고 떠들고, 약속 잡고, 고민 나누고… 그게 아들들에겐 전부예요. 근데 우리는 그걸 인정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당연히 내 말이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내가 벌어다 먹이고, 키워왔고, 세상 사는 법을 가르쳐준 건데, 그 모든 것보다 친구들이 먼저라는 걸 받아들이기 힘든 거죠.”

고수의 말에 남자는 시선을 떨구었다.

한참을 말없이 잔을 만지작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난 아들 마음을 한 번도 묻지 않았나 봐요.”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지난 수년이 스쳐갔다.

회사에서는 외면받고, 집에서는 외면하고.

말이 많았던 건, 사실 외로웠기 때문이었다.

아들과 단절된 채, 자기 말만 되뇌며 살았던 시간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말이 아니라, 마음을 묻는 질문에서 관계는 다시 시작된다는 걸.

그는 주머니 속 쪽지를 한 번 더 만지작거렸다.

아들의 게임 아이디가 적힌, 몇 번이나 꺼냈다 넣었던 그 쪽지.

아내가 예전에 무심히 말했었다.

“게임에서 아들 별명이 뭔지도 모르지? 거기서 친구들이랑 대화하고, 팀 짜고, 싸우고 화해도 한대.”

그땐 코웃음을 쳤다. 게임 따위로 뭘 배우겠냐고.

하지만 오늘 고수의 말을 들으니,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 작은 화면 속이 아이에겐 하나의 세상이라는 걸.

그리고 나는 그 세상 밖에서 문을 두드리지도 않은 채 서 있었음을.

오늘은 그냥 물어보기로 했다. 화내지 않고, 잔소리하지 않고, 그저 궁금해서.

잔을 비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를 밀어 넣는 소리가 조용히 포차 안에 번졌다.

잠시 고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수는 짧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먼저 웃어주면, 말문이 열릴 거예요.”

남자는 문을 열고 나섰다.

밤공기가 차갑게 볼을 스쳤지만, 마음 한구석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멀어져 가는 발자국 소리가 포차 밖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고수는 다시 잔을 닦았다.

그날도, 그리고 그다음 날도 그 자리에 서서 말이 부서지지 않도록 조용히 마음을 닦았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누군가의 굳은 마음이 다시 말을 걸 수 있도록.

다음 누군가를 위해, 그 포차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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