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포차의 천막이 다시 한 번 들추어졌다.
들어선 이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중년 남자였다. 첫인상부터 거칠고 들뜬 에너지가 느껴졌다.
고수는 그를 알아보았다. 몇 달 전 퇴사한 뒤로 소식이 끊긴 직장 동료, 종태였다. 같은 사무실에서 몇 년을 지냈던 사이. 한때는 영업 실적이 좋다고 칭찬도 들었지만, 사람들과 늘 트러블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혼자예요?”
종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수는 잔을 꺼내고, 말없이 술을 따라줬다.
잔을 비우기도 전에 종태는 입을 열었다.
“다 걔가 문제였어. 나, 진짜 잘해주려고 했거든. 근데 결국은 지 멋대로 하더라고.”
고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잔을 닦는 손만 조용히 움직일 뿐.
“내가 이혼하고 나서, 주변에서 다 그러더라. 그래도 애 아빠인데 참고 살지 그랬냐고. 웃기지 않아? 내가 왜 참아야 되는데?”
그는 소주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술기운인지, 분노인지, 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얼마나 바깥에서 고생한 줄 알아? 진짜… 고마운 줄도 모르고, 날 이용만 했어.”
고수는 천천히 술병을 다시 집었다. 종태의 잔을 채우며 물었다.
“그 말을 혼자서 자주 했어요?”
“뭐?”
“다 걔 잘못이라는 그 말.”
“……그렇지. 누가 들어도 걔 잘못이지.”
고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한참 말이 없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인 사람은 말이 깨지지 않아요.”
종태가 찡그린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고수는 잔을 닦던 손을 멈추지 않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혼자서만 같은 말을 계속하다 보면,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잊게 되죠. 처음엔 ‘아닌가?’ 싶었던 것도, 계속 되뇌다 보면 진짜처럼 느껴지고요. 결국엔 자기 말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종태는 말이 없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면, 말도 혼자서 만들어져요. 그럼 그 말이 자기 안에서 굳어버리거든요. 누가 다른 얘길 해도, 안 들리게 돼요.”
고수는 술잔을 하나 더 꺼내, 그 옆에 나란히 놓았다.
“말이 전부가 되면, 사람은 멀어져요.”
종태가 고개를 들었다. 고수는 조용히 잔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처음엔 그냥 답답해서 그러는 거죠. 억울하고 화나고… 그러니까 자기 말만 되뇌게 돼요. 근데 그게 계속되면, 어느 순간 다른 사람 말은 귀에 안 들어와요. ‘내가 맞아, 난 잘못 없어’ 하는 생각만 점점 커지고요.”
고수는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사람 사이에는 말로 이어진 다리가 있어요. 서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마음도 오가고요. 그런데 계속 자기 말만 하면, 그 다리가 끊겨요. 결국 혼자 남게 되죠. 말은 많은데, 들을 사람은 없고… 그게 제일 무서운 겁니다.”
고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그가 말하는 ‘사람이 멀어진다’는 건, 단순히 관계가 끊기는 게 아니라 마음이 닿지 않는다는 뜻처럼 들렸다. 혼자만의 말이 전부가 되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누구의 말도 닿지 않는 곳에 서 있는 셈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종태는 말이 없었다. 술잔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동안 자신이 쏟아냈던 말들이 누구를 얼마나 다치게 했는지 조금씩 되짚어보는 표정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내가 진짜 뭐가 잘못된 건지. 그냥… 너무 허전하고, 아무도 없어.”
고수는 잔을 다시 닦았다.
“사람이 가장 외로울 때는 말이 많아지는 때예요.”
“…….”
“말이 많아지면, 사실은 마음이 무너지고 있다는 뜻이죠. 그 틈으로 바람이 들어오니까.”
종태는 말없이 잔을 들었다. 이번엔 조금 천천히 마셨다. 입안에 맴도는 술맛은 그저 씁쓸했다.
그제야 종태의 뇌리에 이혼하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법원 앞, 잔뜩 젖은 우산을 든 채 멍하니 서 있던 자신. 서류를 건네고 나가던 전 아내의 뒷모습. 아무 말 없이, 그냥 끝이었다. 그렇게 끝나선 안 된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미 너무 늦었고, 이미 너무 많이 엇갈렸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마지막까지 그는 상대의 말은 듣지 않았다. 자기가 옳았고, 자기는 피해자였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점점 그를 홀로 만들었다는 걸, 이제야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그럼… 나는 뭐라도 했나?”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 말은 고수를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더 크게는 자신에게 묻는 말이었다.
고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돌아보는 것부터가 시작이에요. 사람이 가장 아플 때는… 자기가 한 말을 다시 들을 때거든요. 근데 그걸 감당하면, 조금씩 바뀝니다. 마음이, 말이, 그리고 관계가.”
포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바람이 천막을 살짝 흔들고, 술 냄새가 허공을 돌았다.
술병 하나가 바닥나고, 밤도 깊어졌다. 종태는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고수를 향해 작게 인사했다. 말이 아닌, 몸짓으로.
고수는 여전히 묻지 않았고, 여전히 잔을 닦고 있었다.
그 밤, 종태는 처음으로 말이 아닌 침묵 안에서 위로를 느꼈다. 그리고 아주 조금, 자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종태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바닥에 놓인 지갑을 집어 들고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잔 옆에 지폐 한 장을 내려두었다.
지금껏 그 어떤 자리에서도, 이렇게 오래 머문 적은 없었다.
천막을 나가기 전, 그는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고수는 여전히 잔을 닦고 있었다. 여전히 말이 없었고,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순간, 고수가 입을 열었다.
“사람 관계는요, 말보다 먼저 마음이 움직여야 다시 시작됩니다.”
종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 끄덕임엔 조금의 후회, 조금의 깨달음, 그리고 아주 조금의 용기가 담겨 있었다.
천막을 나서며, 종태는 처음으로 혼잣말이 아닌 말을 떠올렸다. 누군가에게 다시 한 번, 제대로 사과하고 싶은 말.
“미안했다. 나만 옳았던 게 아니었어.”
그 말은 아직 목소리로 나오진 않았지만, 그 밤, 그의 마음속에서 아주 작게 시작되고 있었다.
천막이 다시 들리고, 밤공기가 포차 안으로 스며들었다.
고수는 다시 잔을 닦았다. 그날도, 그리고 그다음 날도,
늘 그 자리에 서서 말이 부서지지 않도록 조용히 마음을 닦았다.
말없이, 묻지 않고, 다만 조용히.
다음 누군가를 위해, 그 포차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