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하수로 살아도 괜찮은 날

by 권성선

“이걸 기획서라고 쓴 겁니까?”

팀장의 첫마디에 회의실의 온도가 뚝 떨어졌다.

민석은 고개를 들었지만, 마주친 건 벽 같은 무표정뿐이었다.

팀장은 인쇄물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

“이건 그냥 일기죠. 감정만 잔뜩 담겨 있고, 객관성이 없어요.”

헛기침이 새고, 볼펜이 똑딱거렸다.

분위기는 싸늘했다.

“기획서는 설득이지, 공감 유도가 아니잖아요.”

민석은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기획이 아니라, 자신이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말을 보태는 건 미련해 보였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회의는 곧 끝났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은 흩어졌다.

모니터 앞에 앉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무도 민석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아무것도 챙기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보든 말든, 텅 빈 사람처럼 걷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택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가슴이 조였다.

화가 났지만,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잘못된 게 뭔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만 낙오된 느낌이었다.

저녁이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웃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민석은 그 무리를 비껴, 혼자 건물 밖으로 나왔다.

해는 지고 있었다.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바람은 서늘했다.

감정과 풍경이 따로 노는 날,

세상은 너무 평온한데 마음은 거칠기만 했다.

무심결에 걷다 보니, 익숙한 골목에 닿았다.

낡은 간판, 오래된 천막.

퇴근길의 피난처였던 작은 포차가 그대로 있었다.

민석은 천막 앞에서 멈췄다.

안은 조용했고, 포차 사장이 잔을 닦고 있었다.

이곳 단골들은 사장을 ‘고수’라 불렀다.

진짜 이름을 아는 이는 드물었고, 묻는 이도 없었다.

말은 없지만, 사람 마음을 알아보는 눈과 손이 있었다.

민석 역시 어느샌가 그를 고수라 부르게 됐다.

그는 조심스레 천막을 들추고 들어섰다.

고수가 고개를 들어 민석을 바라봤다.

그뿐이었다.

말도 없고, 표정도 없었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위로 같았다.

묻지 않는 게 지금은 더 따뜻했다.

“혼자예요.”

민석이 말하자, 고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 한 동작으로 충분했다.

조용한 의자, 말 없는 공간.

민석은 의자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사무실에선 그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잠시 뒤, 투명한 잔이 놓였다.

작고, 담백한 유리잔이었다.

민석은 조심스럽게 들었다.

그리고 그때, 고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하수로 살아도 괜찮은 날이 있죠.”

그 말 한마디에, 민석은 멈췄다.

목구멍이 뜨거워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하수’라는 말은 늘 굴욕이었다.

눈치 없고, 실력 없고, 분위기 못 읽는 사람.

그 단어가 붙는 순간, 어떤 설명도 소용없어졌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 말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실패한 하루에도 살아 있어도 된다는 허락처럼 들렸다.

예전 선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넌 진짜, 하수 기질 하나는 타고났지.”

그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오늘은 마음이 느슨해졌다.

민석은 잔을 들었다.

목 넘김은 부드러웠고, 알코올보다 감정에 가까운 맛이었다.

울컥했지만, 조용히 삼켰다.

고수는 여전히 잔을 닦고 있었다.

그 손의 움직임에서 위로 같은 게 느껴졌다.

잔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닦아내는 것처럼.

민석은 조용히 일어났다.

지갑을 꺼내 지폐 한 장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말없이 눈인사를 건네자, 고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막을 젖히고 나설 때, 고수가 말했다.

“다음엔, 누군가에게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날에 오세요.”

민석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고수는 여전히 잔을 닦고 있었다.

말없이, 분명하게.

그 손끝에서 묘하게 익숙한 리듬이 느껴졌다.

어디서 들어봤던… 아니, 봤던 동작 같기도 했다.

하지만 금세, 생각은 멈췄다.

바람이 불었다.

천막이 가볍게 흔들렸다.

민석은 고개를 들어 그 바람을 맞았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눈이 시릴 만큼 맑은 공기.

무너졌지만, 살아낸 하루였다.

그 말 하나로, 오늘은 조금은 덜 아팠고,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다.

고수의 말은 이상하게 낯익었다.

누군가, 아주 오래전 따뜻하게 웃던 얼굴이 그 말과 함께 떠올랐다.

한때 민석이 마음을 기댔던 사람.

그와 이 포차에 함께 왔던 적이 있었다.

그 기억이 고수의 말투와 겹쳤다.

혹시, 고수는 그때 그들을 본 적이 있었던 걸까.

묻지 않았고, 고수도 말하지 않았다.

그날 밤, 민석은 처음으로 감정이 되돌아오고 있다는 걸 느꼈다.

단지 잊고 지낸 사람을 떠올린 게 아니라, 잊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까지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닫혀 있던 감정의 문이 안쪽에서 슬며시 열렸다.

하수로 살아도 괜찮다는 그 말처럼, 조금은 덜 아팠고, 조금은 더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밤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가 떠올린 그 인연과, 묻지 않던 고수와의 이야기는 다시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민석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묵묵히 잔을 닦으며 고수는 기다린다.

또 다른 이야기가, 또 다른 사람을 데려올 거라는 걸.

마음은 돌아 돌아, 결국 닿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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