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이었다. 서울 거리는 이미 조용했고, 그녀의 발걸음은 그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도착한 듯, 지현은 포차 앞에 멈췄다.
천막 틈 사이로 부드러운 불빛이 새어 나왔다.
왜인지 모르게 이곳이 떠올랐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조용히 위로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현은 오래전, 소아중환자실 간호사였다.
잠들지 않는 병동의 불빛 아래서 그녀는 수많은 아기의 생사를 손끝으로 넘겨야 했다.
그곳은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모니터에 띄워진 심박 수치는 조금만 흔들려도 알람이 울렸고, 한 치의 지체도 용납되지 않는 상황이 끊임없이 반복됐다.
주먹만 한 심장에 붙인 패드, 끝없이 삑삑거리는 기계음, 삐걱이는 인큐베이터 뚜껑을 여는 순간의 냉기.
눈을 마주치기도 어려운 작디작은 생명에게 산소를 불어넣고, 약물을 주입하고, 때로는 가슴을 압박해야 했다.
그 작은 몸 하나를 살리기 위해 세 명, 네 명이 동시에 달려들어야 하는 순간도 많았다.
지현은 언젠가부터 눈물샘을 닫는 법을 배웠다.
눈물은 감정을 흐리게 하고, 감정은 손을 흐트러뜨리니까.
“간호사 선생님, 살릴 수 있죠?”
의사가 아닌 자신에게 묻는 보호자의 눈빛 앞에서 지현은 매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더 꽉 쥐었다.
그녀의 손은 늘 바빴고, 망설임이 없어야 했다.
가끔 한밤중, 아주 작게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엔 침대 머리맡에 앉아 아기들의 손을 가만히 쥐고 기도처럼 속삭였다.
‘잘 버텨줘서 고마워. 내일은 조금 더 편안하자.’
그녀는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과 마주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생명의 문턱을 넘나들며 버텼다.
가쁜 숨, 경련하는 몸, 멈추는 심장.
그 모든 순간마다 그녀는 재빠르게 판단하고 침착하게 움직여야 했다.
감정은 잠시 접어두고, 손과 머리만으로 대응하는 것이 숙명이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밤이었다.
퇴근 후, 그녀는 세 살배기 아들과 집에 있었다.
평소처럼 목욕을 마친 아이를 수건으로 감싸 안던 순간, 갑작스러운 경련이 시작됐다.
작은 몸이 굳어가고, 입가엔 거품이 일었다.
눈동자가 뒤집히고, 숨이 멎을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지현은 반사적으로 아이를 눕히고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
병원에서 수없이 반복했던, 익숙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손이 떨렸다.
가슴 압박의 리듬은 흐트러졌고, 인공호흡은 타이밍을 놓쳤다.
‘틀리면 안 돼. 멈추면 안 돼.’
머리는 그렇게 외치고 있었지만, 심장은 쿵쿵 미친 듯이 뛰었다.
눈앞의 아이는 점점 더 경직되어 갔고, 그토록 익숙했던 응급 절차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간호사가 아니었다. 그저 공포에 질린 엄마였다.
병원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이는 응급실에 도착한 뒤, 곧바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지현은 의료진의 지시에도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긴급한 손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그 순간 그녀는 더 이상 그 세계의 사람이 아니었다.
익숙한 기계음, 빠르게 오가는 의사들의 목소리,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서 너무 멀리 있었다.
그날 밤, 아이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로 지현은 병원을 그만두었다.
하얀 유니폼을 벗고, 모두 손에서 놓아버렸다.
‘남의 아이를 살리던 손이 정작 내 아이는…”
그 말은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지만, 그 죄책감은 날마다 그녀를 옥죄었다.
감정의 발작처럼 매일 밤 그녀를 덮쳤다.
간호사로 살아왔던 시간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그 손은 더 이상 생명을 책임질 수 없는 손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는 손을 멈췄고, 말도 줄었다.
그 사건 이후, 그녀는 세상의 소리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잠들지 못한 채 새벽을 넘기고, 거리를 걷다 멈춰 선 어느 날 밤.
이상하게도 떠오른 건 그 포차였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곳.
누군가, 묻지 않고 내 마음을 알아줄지도 모르는 공간.
몸보다 마음이 먼저 그곳에 도착했다.
그날 밤, 지현은 조용히 천막을 밀고 들어섰다.
천막을 젖히고 들어섰을 때, 고수는 여전히 잔을 닦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손의 움직임은 참 이상했다.
잔을 닦는 동작인데, 자꾸만 사람의 마음을 닦아내는 것 같았다.
지현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잠시 뒤, 투명한 잔 하나가 조용히 놓였다.
지현은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잔을 감쌌다.
한 모금 넘긴 술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오래 굳어있던 감정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아이 엄마였어요. 간호사이기도 했고요."
그녀가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고수는 여전히 잔을 닦고 있었다.
묻지 않았고, 재촉하지도 않았다.
"남의 아이는 그렇게 잘 살려놓고… 내 아이는… 그날, 내가 아니었으면 살았을지도 몰라요."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무너졌던 감정이 고개를 들듯 지현도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고수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잔을 닦고 있었다.
그 손끝의 리듬은 흔들리지 않았다.
침묵은 말보다 먼저 마음을 어루만졌다.
잔을 닦는 손끝에서 오래된 위로가 흘렀다.
지현은 그 손을 바라보다, 거의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냥 잔을 닦는 건데… 이상하죠. 왜 그게 사람을 살리는 것처럼 보일까요.”
고수는 잔을 닦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천천히 눈길을 들었다.
말 없는 시선 하나가 모든 대답 같았다.
짧은 눈빛이 지현의 얼굴을 스쳤고, 다시 잔 위로 돌아갔다.
그 눈빛에는 판단도, 동정도 없었다. 오직 이해만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천막이 바람에 흔들렸다.
지현은 그 소리에 놀라듯 뒤를 돌아봤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날 이후로… 내 손을 못 믿겠어요. 누굴 살릴 수 있을 거란 믿음이 그날 다 무너졌거든요.”
고수는 그 말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그 아이도 마지막까지 엄마 손을 느꼈을 거예요. 살리는 건 실패했을지 몰라도, 사랑은 분명히 닿았을 겁니다.”
지현의 눈가가 붉어졌다.
고수의 말은 오래 전 동료 간호사가 건넸던 말과 꼭 닮아 있었다.
장례식장구석, 찬바람이 스며들던 조문실 구석에서 말없이 곁을 지키던 후배가 조심스럽게 건넸다.
“선생님 잘못 아니에요. 그 아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엄마의 손을 느꼈을 거예요. 심장이 멈췄어도 사랑은 분명히 전해졌을거에요.”
지현은 그 말을 믿지 못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 자기 자신을 미워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 포차에서 고수의 조용한 말 한마디가 그 오래된 상처를 다시 건드렸다.
예기치 않게, 조심스럽게, 부드럽게.
‘정말, 그럴 수 있었을까… 내 손끝에 아이가 마지막으로 남긴 감각이 있었을까… 살려내진 못했지만, 사랑은 닿았던 걸까.’
지현은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잔 아래로 흘러내렸다.
말이 없던 고수는 여전히 잔을 닦고 있었다.
그 손끝의 조용한 움직임이 그 어떤 말보다 큰 위로처럼 느껴졌다.
지현은 지갑을 꺼내 지폐 한 장을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요. 오늘이 아니었으면… 나, 정말…”
그녀는 말을 멈췄다. 말보다 먼저 눈빛이 흔들렸다.
고수는 가만히 잔을 닦을 뿐이었지만, 그 조용한 움직임이 위로처럼 이어졌다.
천막을 젖히고 나설 때, 고수가 말했다.
“다음엔, 당신 손으로 누군가를 위로해 주고 싶을 때 오세요.”
지현은 그 말에 돌아봤다. 고수는 여전히 잔을 닦고 있었다. 말없이, 분명하게.
천막 밖 바람은 차가웠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처음보다 덜 무거웠다.
그날 밤 이후, 지현은 다시 포차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고수는 안다.
언제나 그렇듯, 또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을 거라는 걸.
말없이 잔을 닦으며, 조용히 기다릴 뿐이다.
마음이 향하는 자리는 결국 서로를 데려오게 되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