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비 오는 날, 핸들 위의 손

by 권성선

비는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얌전히 내렸다가 한밤이 되자 장대처럼 굵어졌다.

만식은 인적 드문 골목 전봇대 아래 서 있었다. 우비 모자를 눌러쓰고, 손엔 호출 앱이 켜진 휴대폰을 쥐었다. 액정 위로 빗방울이 떨어져 숫자가 일그러졌다.

차는 없지만 그는 운전기사였다. 밤마다 남의 차를 몰아 남의 집 앞에 누군가를 내려준다. 그게 지금 그의 일이고, 그의 새벽이었다.

앱이 울리길 기다리며 그는 길 건너 편의점 네온사인을 멍하니 바라봤다. 초록과 빨강이 번갈아 빛났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곳이었다. 대리기사에게 편의점은 시간이 남을 때만 갈 수 있는 사치였다.

삐-익. 호출 알림음이 울렸다.

“합정에서 홍제.”

그는 짧게 중얼거리며 지도 경로를 확인했다. 근처였다.

손님 차량이 서 있는 골목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가 가로등 불빛을 삼키듯 번들거렸다. 그는 빠르게 골목을 건너 가게 앞에서 손님을 만났다. 술집 앞, 택시 줄을 비켜 선 남자가 비틀거리며 차키를 건넸다.

차 안은 소주 냄새로 가득했다.

“기사님, 좀 천천히 가요. 속이 울렁거리네.”

뒷좌석의 중년 남자가 창문을 조금 열었다. 비가 흩뿌리듯 스며들었다. 만식은 와이퍼 속도를 높이며 “네”라고 짧게 대답했다.

라디오에서 색소폰이 길게 울었다. 음이 늘었다 줄었다 하며 빗줄기와 박자를 맞췄다. 만식은 브레이크를 밟는 발목에 힘을 고르게 실었다. ‘아직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운전대 위의 감각 하나로 버티는 밤이었다.

홍제 입구에서 차를 세우자, 손님은 이만원을 건네며 “고생 많아요” 하고 문을 닫았다. 그 말은 진심인지 습관인지 알 수 없었다.

문이 닫히자 차 안은 순식간에 비와 어둠만 남았다.

만식은 천천히 운전석을 나와 손님에게 키를 건네고, 다시 전봇대 아래로 걸어갔다.

새벽 두 시 반.

비는 여전했고, 대기는 차가웠다.

호출 앱 불빛이 한동안 꺼진 채였다. 손바닥이 젖어 있었다. 비 때문인지 땀 때문인지 애매했다. 그는 휴대폰 화면을 꺼내보다가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 호출은 장거리였다. 교외로 빠지는 도로. 젖은 아스팔트 위에 헤드라이트가 길게 번졌다. 뒷좌석 여자는 창에 이마를 대고 중얼거렸다.

“밤은 항상 시원하네요.”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시원하다기보다 서늘했다. 그 서늘함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어떤 냄새와 닮아 있었다.

손님을 목적지에 내려준 뒤, 그는 다시 길 위로 나왔다. 다음 호출이 오기 전, 편의점 차양 밑에 서서 삼각김밥 포장을 뜯었다. 김 냄새가 비 냄새와 섞여 올라왔다. 밥알이 입안에 퍼지기도 전에 오래 눌러뒀던 과거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형광등이 새하얀 사무실. 서류철과 계약서가 책상 위에 층층이 쌓여 있던 오후. 점심시간마다 웃음이 가득하던 직원들. 거래처 사장이 “믿고 갑시다”라며 악수를 건네던 손의 온기. 그 모든 것이 다섯 해 전, 단 한 장의 부도 통보서로 무너졌다. 종잇장은 얇았지만, 삶을 무너뜨리기엔 충분히 날카로웠다. 전등이 꺼진 날, 그는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모니터 속 가족사진이 과하게 환했다. 그 웃음이 분필가루처럼 가슴에 뿌옇게 내려앉았다. 책상 모서리를 휴지로 쓸어도 닦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세 번째 호출은 취객이었다. 차 문이 ‘툭’ 닫히자 좁은 실내에 술 냄새가 가득찼다.

“형씨, 인생은 원래 이런 거야. 알지?” 손님이 말을 쏟다가, 어느 순간 잠들었다. 고개가 툭 떨어지고, 가느다란 코골이가 이어졌다. 그는 백미러로 손님의 어깨선을 확인하고, 다시 도로로 눈을 돌렸다.

다리 위였다. 바람이 세졌다. 강물 위 도시 불빛이 잘게 부서졌다. 뉴스 앵커가 새벽 기온과 습도를 읊었다. ‘바닥을 달린다’는 말이 떠올랐다.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속도라는 뜻으로 그는 그 생각을 미끄러뜨리듯 흘려보냈다. 아직은 멈추지 않는 쪽을 택해야 했다.

새벽 네 시를 넘긴 시간, 더 이상 호출은 오지 않았다. 호출 앱을 껐다. 손바닥이 젖어 있었다. 비인지 땀인지 애매했다. 허기가 먼저 올라왔다. 그는 모자를 더 깊이 눌러쓰고 골목 바닥의 물웅덩이를 피해 천천히 걸었다. 멀리서 주황색 간판 불빛이 비에 젖어 흔들렸다. 그곳으로 가면 괜한 인사도 필요 없었다.

‘고수포차.’

천막은 절반쯤 걷혀 있었고, 안에서는 라면 국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만식은 모자를 눌러쓰고 천천히 발을 옮겼다.

예전엔 깨끗한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사람들 사이에서 웃던 얼굴이었다.

지금은 목이 늘어난 반팔티에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양손을 깊게 주머니에 처박은 채였다.

“고수, 고기 좀 있지?”

만식이 웃었지만, 웃음은 입술 끝에서만 스쳤다.

그의 이야기는 지난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출 계약 하나만 성사되면 버틸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환율이 치솟았고, 거래처는 ‘죄송하다’는 메일 한 줄 남기고 연락을 끊었다.

‘잘 되겠지’라는 말은 한순간에 사치가 됐다.

은행 대출은 연체됐고, 사무실 전등은 꺼졌다.

한동안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 바탕화면 속 웃고 있는 가족사진만 바라봤다.

그 사진 속 미소가 오히려 그를 더 작게 만들었다.

결국 남은 건 갚아야 할 빚과 버려진 명함뿐.

낮에는 채권자와 설전을 벌이고, 밤이 되면 휴대폰에서 대리운전 앱을 켰다.

검은 승용차 문이 ‘툭’ 닫히는 순간부터 그는 다른 사람이 됐다.

“요즘은 밤이 더 길어.”

포차에서 잔을 들며 만식이 말했다.

“손님을 내려주고 발걸음을 돌릴 때… 그게 제일 쓸쓸해. 골목엔 사람 그림자 하나 없고, 멀리서 가게 셔터 내리는 소리만 들려. 그럴 땐 내가 바닥 끝까지 걸어가고 있는 것 같아.”

고수는 말없이 잔을 채웠다.

천막 밖 빗방울이 규칙적인 리듬을 탔다.

안에서는 불판 위 고기가 노릇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만식은 젓가락을 들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신기하지. 새벽에 그 긴 다리를 건너면… 아직 내가 운전은 잘하더라. 이게 뭐라고, 그게 좀 위안이 돼.”

그 눈빛에는 체념 속에 숨은 작은 자긍심이 번졌다.

고수는 불판 위 남은 고기를 옆 접시에 옮겼다.

“사업 다시 시작할 거야?”

만식은 잠시 젓가락을 쥔 채 머뭇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응. 근데 이번엔 조용히. 실패해도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고수는 그를 잠깐 바라보다가 술잔을 채웠다.

“그 정도면 돼. 사람 사는 게 그거면 충분해.”

만식은 천천히 술잔을 내려놓았다.
밖에서는 빗방울이 천막 위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래, 이 정도면 됐다.
한 번에 세상을 이길 필요는 없지.
오늘만 버티고, 내일도 버티면… 그게 사는 거다.

천막 밖 빗소리가 한층 깊어졌다.
그때, 고수가 빈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따뜻한 물이 그릇 안을 감싸고, 곧이어 표면을 천천히 훑는 손길이 이어졌다.
물결이 그릇 안을 한 바퀴 돌 때마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좌절이 조금씩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그 소리는 서두르지 않았고,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언가를 지워내고 있었다.
빗소리와 맞물려 한동안 이어진 그 소리에 만식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숨을 고르듯 앉아 있었다.
그렇게 고수포차의 밤은 또 한 사람의 마음을 조용히 씻어내며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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