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올해 예순여덟이었다.
가만히 따져 보니 인생의 절반 이상을 대출과 함께 살아온 셈이었다.
처음 돈을 빌린 건 집을 장만할 때였다.
"이 집이면 아이들 키우기에 딱이겠네요."
부동산 중개인의 말에 마음이 동해 덜컥 계약을 진행했었다. 집은 그럴듯했지만, 통장은 늘 비어 있었다. 부동산에서 서류에 도장을 찍던 순간 그는 어쩐지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그 도장이 자신의 목에 수갑처럼 채워질 줄은.
아이들이 자라면서 학자금 대출이 뒤따랐다. 한때는 사업을 벌였다가 실패해 은행빚까지 끌어안았다. 월급날만 되면 통장은 거쳐가는 길이었고, 언제나 빠져나가는 건 이자였다.
"아버지, 왜 이렇게 힘들게만 사세요?"
아이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그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빚은 늘 그의 입을 막았다. 빚은 늘 그의 등을 굽게 했다.
그리고 오늘 은행 창구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며 손에 땀이 흥건히 맺혔다.
번호표 위에 새겨진 숫자가 화면에 뜨자 그는 천천히 창구 앞으로 걸어갔다.
직원이 친절하게 말했다.
"고객님, 오늘로 상환이 모두 완료됩니다."
종이 위에 '완납'이라는 글자가 찍히는 순간 그는 멍해졌다. 30년 가까운 세월, 늘 목에 걸려 있던 무거운 쇳덩이가 떨어져 나간 듯했다.
"이제 자유입니다."
직원이 웃으며 말했지만, 그 말이 그의 가슴엔 이상하게 허전하게 울렸다.
은행을 나와 거리를 걸었다. 모든 게 똑같았다. 붐비는 사람들, 신호등, 자동차 소리. 그런데 그는 달라져 있었다. 더는 은행에 쫓길 필요가 없는 사람. 빚 없는 사람.
그런데 이상했다.
기쁨 대신 공허가 밀려왔다. 평생 '갚아야 한다'는 목표로 달려왔는데, 이제는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 허공에 매달린 풍선처럼 몸은 가벼운데 마음은 방향을 잃은 듯했다.
집으로 곧장 들어가기 싫었다. 기쁨을 나눌 사람도, 허무를 들여놓을 공간도 없었다. 발걸음이 향한 곳은 골목 끝 허름한 포차였다.
천막 사이로 김이 새어 나오고,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고수포차.' 문을 밀자 따끈한 국물 냄새와 술 냄새가 뒤섞여 그를 감쌌다.
테이블 몇 개가 놓인 좁은 공간,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그는 구석 자리에 앉아 소주를 주문했다.
잔에 술이 채워졌다. 첫 잔을 털어 넣으니 목구멍이 화끈거렸다. 그제야 하루가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
술이 몇 잔 돌자 입이 무거운 그도 말을 꺼냈다. 옆에서 잔을 채워주던 고수가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이세요?"
그는 피식 웃었다.
"오늘 빚을 다 갚았습니다. 서류에 도장이 찍혔지요. 30년 만에 드디어 내 이름 앞에서 '대출'이라는 글자가 사라졌습니다."
그는 잔을 또 기울이며 말했다.
"젊었을 땐 빚만 갚으면 뭐든 다 잘 될 줄 알았소. 근데 막상 다 갚고 나니… 기쁘기보단 허무하구려. 그동안 뭘 위해 살았나 싶소."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이들한테도 미안하고. 늘 빠듯하게만 키워서... 아내한테도 미안하지. 젊을 때 좀 더 편하게 해줬어야 했는데…"
잔이 다시 채워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들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오늘만큼 내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졌소."
고수는 잠시 말없이 잔을 닦다가 낮게 대답했다.
"빚이 무거운 만큼 사람을 버티게도 합니다. 허무한 건 당연해요. 이제부터는 빚이 아닌 당신 삶의 이유를 찾아야겠지요."
그의 눈가가 젖었다.
"허허… 늦게라도 자유를 맛보니 이렇게 울컥할 줄은 몰랐소."
포차 안은 잠시 조용해졌다. 술잔에 떨어진 눈물이 소주와 섞여 은빛으로 빛났다.
밖에는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잔을 들며 혼잣말했다.
"내일부터는 그냥 나로 살아야지."
고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채워주었다.
"오늘은 축하해야 할 날입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날이니까요."
그는 잔을 비우고 조용히 웃었다. 30년 만에 찾아온 가벼움, 그 낯선 감정 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 잔을 비우고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술잔에 흘러들어 은빛으로 번졌다. 포차 안은 잠시 고요했다. 술잔 부딪히는 소리도, 웃음소리도 멀리서만 들렸다.
그때 고수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낡은 행주를 꺼내 들더니 깨끗한 접시 하나를 정성스레 닦기 시작했다. 소리 없는 그 손길에 말로 할 수 없는 위로가 스며 있었다.
그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마침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마치 "당신의 삶, 여기까지 잘 버티셨습니다"라는 말 없는 축복을 받은 듯했다.
창밖에는 겨울바람이 여전히 매서웠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켠은 이상하게 따뜻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