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간판을 다시 걸었을 때, 신도시는 아직 덜 깨어 있었다. 같은 크기의 창문이 줄지어 있는 아파트 단지, 비닐을 벗지 못한 가로수, 역 앞 상가 1층에 겨우 붙인 하얀 간판. 문을 열면 남은 페인트 냄새와 낡은 합판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중고 책장에는 등기부등본 서류철, 볼펜, 스탬프가 있다. 그리고 벽에는 ‘과유불급, 예산 준수’라고 적혀 있는 종이가 붙어 있다.
스물아홉에 회사를 그만두고 중개사 시험지를 베개 삼던 시절이 있었다. 세 번 떨어지고 네 번째 합격했을 때, 그는 스스로에게 작게 축배를 들었다. 첫 계약을 따낸 날, 남향집의 햇살을 칭찬하며 신혼부부가 도장을 찍고 나가자, 그는 빈 사무실에서 불을 끄며 혼잣말을 했다. 이제 나도 사람들에게 집을 건네줄 수 있구나.
그러던 어느 여름, 은행에서 전화가 왔다.
“고객님, 해당 주택에 추가 근저당이 설정되어 있고”
“무슨 말씀이세요? 전세 보증금은 안전하다고”
상대 목소리는 매끄러웠고, 단어들은 차갑게 정리되어 있었다. 깡통전세. 그 두 글자가 전화를 끊고 나서야 확실히 들렸다. 그는 일주일 후에 집을 비웠다. 상자에 책을 넣고, 아이의 장난감을 넣고, 마지막으로 비밀번호를 눌러 보았다. 띠띠—. 현관에 기대 있던 빗자루가 툭 쓰러졌다. 그 소리가 귀에 오래 남았다. 이 소리를 잊지 말자. 무언가를 마지막으로 닫는 소리.
한동안 그는 일을 놓고 밤마다 아무 데나 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살아야 했다. 다시 부동산을 할 거라면 ‘처음’을 많이 겪는 곳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도시를 골랐다. ‘첫’으로 시작되는 말이 많은 곳. 생애 첫 주택, 첫 혼수, 첫 전입신고. 첫 아이가 울고 웃을 거실.
그의 사무실 문은 자주 열렸다. 얼굴에 기대와 불안이 섞인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는 전보다 천천히, 더 꼼꼼하게 말하기로 했다. 계약서의 작은 글씨를 손가락으로 짚어주고, 권리관계의 실털기를 같이 해주고, 집주인의 말버릇까지 기록했다. 나는 다시는 사람을 집에서 밀어내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
오전엔 신혼부부가 왔다. 신랑의 눈 밑이 퀭했고, 신부는 계산기를 쥐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가능해요.” 신부가 숫자를 보여줬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대신 조건 정하죠. 햇빛, 소음, 관리비. 층, 엘리베이터, 쓰레기동선.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돌아와서 후회하지 않는 거.”
그날 다섯 집을 봤다.
첫 번째는 채광이 좋았지만 오후 두 시만 넘으면 맞은편 동 그림자가 길게 눌렀다.
두 번째는 조용했지만, 초등학교 종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세 번째 집에서 그는 스탠드 불을 켰다. 누런 빛 아래 작은 식탁이 반짝였다. 창문을 열자 전철이 지나가며 바람을 남겼다.
“여긴 저녁이 예쁠 것 같습니다.” 그가 말했다.
신부가 웃었다. “저녁이 예쁜 집이라니 그런 말은 처음이네요.”
도장을 찍기 전, 둘은 잠깐 망설였다. 신부가 말했다. “우리가 이걸 해낼 수 있을까요?”
신랑이 그 손을 잡았다. “우린 늘 해냈잖아.”
잉크 냄새가 살짝 올라왔다. 도장이 종이에 붙는 소리가 아주 작게, 탁. 그의 가슴도 같이 눌렸다가 풀렸다. 남의 집 문을 여는 순간에 나는 잃어버린 문을 조금씩 되찾는다.
며칠 뒤, 청년이 찾아왔다. 카고백을 내려놓고 말했다.
“고양이를 키우는 것이 허용되는 집을 구하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집주인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요. 냄새 나고 벽이 남아나지 않아요”
그는 묻는다. “이름은요?”
“담이요. 담요처럼 따뜻하라고요.” 청년이 휴대폰 사진을 보여줬다. 금빛 눈의 고양이가 사람 손가락을 깨무는 사진. 털이 얇고 표정이 유난히 얌전했다.
그는 집주인을 따로 만났다. 마주 앉아 차를 두 모금씩 마신 뒤, 꺼내든 건 ‘반려동물 특별 약정서’였다.
“소음 민원 발생 시 즉시 조치, 퇴거 시 전문 클리닝 비용 전액 부담, 벽지·마루 파손 시 실비 보상, 보증금 50만 원 별도 적립—문제 없으면 전액 반환. 이렇게 하면 어떠세요.”
집주인이 표정을 굳혔다. “그래도 냄새는…”
그는 청년의 사진을 더 보여줬다. 창가에서 햇볕을 받는 사진, 수건 위에 몸을 말아 올린 사진, 사람 무릎 위에서 자는 사진.
집주인이 마지막 사진에서 웃음 비슷한 한숨을 쉬었다. “이 녀석은 얌전해 보이네.”
“얌전합니다. 그리고 오래 살 겁니다. 반려동물 키우는 세입자는 이사 잘 안 나갑니다.”
잠깐의 침묵 후, 집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대로 하죠. 대신—관리규약 위반하면 바로 조치.”
“당연하죠.”
청년은 사무실에서 허리를 깊이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요.” 그가 손사래를 쳤다. “저 같은 사람이니까요. 집에서 밀려나 본 사람은 집에 들어가는 마음을 좀 압니다.”
청년이 나가자 문틈으로 찬 바람이 들어왔다. 그는 종이컵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달력을 넘겼다. 오늘 날짜 옆에 작은 글씨를 썼다. 담이 입주 예정. 글씨 옆에서 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늘이 아니라 지붕처럼.
저녁 무렵, 아까 그 신혼부부가 붕어빵을 들고 다시 왔다.
“오늘 첫 저녁 먹었어요. 중개사님 덕분입니다.”
봉투를 받아 들자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 그는 말을 고르고, 두 번 고개를 숙였다. 문이 닫히고 나자 봉투에서 나온 김이 사무실 천장에 얇게 닿았다. 집은 따뜻함이 위로 올라가는 방향을 아는 공간이구나.
그는 붕어빵 봉투와 서류철 두 개를 들고 고수포차로 갔다. 천막은 바람에 들썩였고, 연탄불 냄새가 골목을 채웠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말했다.
“사장님, 오늘은 소주 원룸으로 갈게요. 간단하지만 기본 갖춘 걸로.”
옆자리에서 누군가 웃었다. “그럼 맥주는 투룸?”
그가 맞장구쳤다. “넓고 시원하죠. 오래 있으면 배가 부담되긴 하지만.”
“양주는 펜트하우스?”
“눈으로만 구경.”
한 손님이 끼어들었다. “막걸리는 뭐예요?”
그가 웃었다. “단독주택. 정겹고 푸근한데, 관리가 좀 필요합니다.”
고수가 김치찌개를 푹푹 끓이며 물었다. “오늘은 무슨 계약이었나?”
그가 붕어빵 봉투를 밀어주었다. “첫 저녁 먹은 부부가 이거 놓고 갔습니다.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
“고양이?”
“집주인을 설득했죠. 약정서 만들고, 보증금 조금 더 쌓고. 고양이 이름이 ‘담이’래요. 담요처럼 따뜻하라고.”
주변에서 조용히 웃음이 퍼졌다. 누군가가 “요즘 집구하기 전쟁이라더니, 이 포차에 군수물자 들어왔네. 붕어빵” 하고는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는 잔을 들었다. “내 집은 아직 없지만 오늘은 두 집을 얻은 기분입니다. 누군가의 첫 저녁 식탁, 누군가의 창가. 이상하죠? 남의 집 이야기인데도 내가 같이 사는 것 같아요.”
한 손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 없는 중개인이니까 더 절실하게 찾아주는 거지.”
다른 손님이 농담을 보탰다. “형, 집은 없는데 단골자리 있잖아. 항상 저기 테이블.”
그가 웃었다. “맞습니다. 저는 고정금리 대신 고정석이 있죠.”
술이 더 돌자 그는 가볍게 털어놓았다.
“가끔은요, 제 이름으로 된 집을 다시 못 가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하게도 그 생각이 예전만큼 무겁지는 않아요. 오늘 같은 날은 특히.”
옆자리에서 “왜요?” 하고 묻자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집이라는 말이 벽과 지붕을 떠나 사람들 얼굴에 붙는 것 같아서요. 저 문을 나가서 각자 불을 켜는 순간, 내가 거기에 조금 붙어 있는 기분이 듭니다.”
포차 안에는 김치찌개가 더 팔팔 끓는 소리, 연탄을 고르는 소리, 천막을 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겹쳤다. 골목 끝에서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섰다가 다시 출발했다. 도시의 생활 소리가 이상하게도 한 집의 생활 소리처럼 들렸다.
그는 마지막 잔을 천천히 들었다.
붕어빵 봉투에서 아직 김이 가늘게 오르고 있었다.
잔을 기울이자, 소주 한 방울이 바닥에 또르르 흘렀다.
빈 잔 위로 천막 불빛이 흔들리며 일렁였다.
그는 낮게 웃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 집은 없어도, 오늘은 돌아갈 자리가 생겼네요.”
그는 잠시 빈 잔 속을 내려다보았다.
불빛은 금세 잦아들었지만, 마음속엔 오래 지워지지 않을 빛이 남았다.
밖에서는 바람이 천막을 흔들었고, 골목 어귀 아파트 창문마다 불이 켜졌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불빛 사이에 그 역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