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케이크 대신 양주

by 권성선

그녀의 방은 창문 하나 없는 고시원이다. 한쪽 팔을 뻗으면 벽에 닿고,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면 책상이 걸리는 좁은 공간. 옆방 공무원 준비생의 알람이 벽을 타고 전해져 왔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 되었다.

서울에 올라온 지 다섯 달. 부모님께는 '학교 기숙사에 들어갔다'고 거짓말을 했다. 실제로는 기숙사비가 너무 비싸서 기숙사 신청조차 할 수 없었다. 스무 살의 첫 독립은 그렇게 좁고 어두운 방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밤새 일하고 오전 수업을 듣는 것은 힘들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밤 시간대 편의점은 생각보다 바빴다. 야식을 사러 오는 대학생들, 야간 근무를 마치고 맥주를 사가는 직장인들, 새벽 배송을 위해 들르는 택배 기사들. 각자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기도 했다. 언젠가 나도 여유롭게 야식을 사러 올 수 있을까?

새벽 3시가 지나면 편의점은 조용해졌다. 그때가 되면 그녀는 바닥을 닦고, 진열대를 정리하고, 유통기한을 확인했다. 단조로운 작업이었지만 그 시간만큼은 마음이 평화로웠다. 아무도 그녀를 평가하지 않았고, 그녀의 형편을 묻지도 않았다. 그저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해내면 되는 단순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문제가 생겼다. 밤샘 근무로 인해 수업 결석이 늘어났고, 몸은 점점 지쳐갔다. 무엇보다 통장 잔고는 바닥을 기었고, 부모님께는 차마 말할 수 없는 현실이 답답하게 그녀를 짓눌렀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고시원에 살던 언니가 그녀의 상황을 눈치채고는 넌지시 노래방 아르바이트를 권했다.

“노래방 알바 해볼 생각 없어? 내가 하는 곳인데 카운터만 보면 돼. 시급도 편의점보다 훨씬 좋고."

그녀는 언니의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노래방은 학교 근처에 있었고, 복잡한 일 없이 그저 계산하고 방을 배정해주는 일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그녀는 두 번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노래방 사장은 40대 중반의 여성이었다. 사장은 그녀를 보자마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얼굴도 예쁘고, 말도 잘 하네. 손님들이 좋아할 것 같아."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그냥 웃어넘겼다.

첫 주간은 정말로 카운터 업무만 했다. 손님이 오면 방을 배정하고, 시간을 체크하고, 계산을 했다. 그리고 손님들이 나가면 재떨이를 비우고, 청소를 했다. 생각보다 쉬웠다. 손님들도 대부분 친구들끼리 와서 노래를 부르고 떠들다 갔다. 그녀는 안도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카운터에 앉아 손님들의 웃음소리와 노랫소리를 들으며 조금씩 늘어가는 통장 잔고를 보며 안도했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도우미 언니 한 명이 갑자기 못 나오게 되었다는 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장은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수지야, 오늘 도우미 언니 한 명이 못 나와. 3번 방 좀 들어가서 도와줄 수 있어? 어려운 거 아니야. 그냥 들어가서 분위기 맞춰주고, 노래 신청해주고, 박수 쳐주면 돼. 한 시간만."

그녀는 순간 망설였지만 사장의 눈치를 보며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두려움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방에 들어가니 손님들은 이미 술에 취해 노래 부르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녀는 그저 시키는 대로 곡을 입력하고, 템포에 맞춰 박수를 치고, 어색하게 몸을 흔들었다. 손님들은 그녀의 어설픈 모습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렇게 시작된 '대타'는 생활비를 조금씩 더 채워주는 마법 같은 일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날, 그녀의 스무 번째 생일에 찾아왔다. 늦은 밤, 방 안은 담배 연기와 술 냄새로 가득했다. 손님들의 얼굴은 술기운에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처음 30분은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가 달라졌다. 술이 더 들어간 남자가 그녀 옆에 바싹 붙어 앉으며 말했다.

“야, 이리 와서 옆에 앉아봐. 노래만 넣어주지 말고, 같이 한잔하고 놀아야지.”

그리고는 억지로 양주잔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녀가 당황하는 사이 남자의 손길이 점차 노골적으로 변했다. 허리에, 어깨에, 마치 물건을 만지듯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거리를 두려 했지만, 분위기를 깨면 사장이 불같이 화를 낼 게 뻔했다. 속으로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야 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그녀의 스무 번째 생일은 낯선 사람들의 끈적한 손길과 술 냄새로 채워졌다.

새벽 3시가 넘어서야 겨우 방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손님의 손길이 여전히 몸에 달라붙어 있는 듯한 불쾌한 감각에 온몸이 떨렸다. ‘자립’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던 이 모든 일들이 오늘은 그 명분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스무 살이 되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다. 어른이 된 기분, 독립한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좁은 고시원, 끝없는 아르바이트, 그리고 오늘 같은 굴욕까지. 케이크 한 조각 없는 스무 살의 생일, 술만 가득 찼던 생일. 그녀는 텅 빈 새벽 거리를 힘없이 걸었다.

그때, 골목 끝에서 은은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허름한 나무 간판, ‘고수포차’. 문득 따뜻한 기운에 이끌린 그녀는 주저하다가 문을 열었다. 보글보글 끓는 찌개 냄새와 함께 따스한 공기가 그녀를 감쌌다.

“어서 와요.”

고수가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하루 종일 억눌렀던 감정이 둑이 터졌다.

"사장님, 오늘... 제 생일이에요."

고수는 설거지하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생일이요?"

"네. 스무 번째... 그런데 케이크 대신 술만 마셨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고수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어떤 판단이나 동정의 기색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경청하는 모습이었다.

"많이 힘들었을 것 같네”

고수의 말 한마디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늘 하루, 아니 지난 몇 달 동안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저... 사실 기숙사에 사는 게 아니에요. 고시원에 살아요. 부모님께는 거짓말했고... 아르바이트하느라 수업도 제대로 못 듣고... 오늘도 일하다가 이렇게 됐어요."

고수는 조용히 들어주었다. 중간에 끼어들거나, 충고하거나, 위로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잠깐만요."

고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포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의아해했다. 혹시 자신의 이야기에 부담을 느낀건가?

10분 정도 지났을까. 문이 다시 열리고 고수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작은 케이크 상자가 들려 있었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지만,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생일이면 케이크는 있어야지. 축하해요, 스무 살.”

그녀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하루 종일 견뎌낸 모든 순간이 그 한마디에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이번 무너짐은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고수는 초를 꽂아주며 말했다.

“자, 여기 촛불. 마음속으로 소원 빌어봐요.”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속으로 조용히 빌었다. 이 낯선 도시에서 무너지지 않기를. 나를 조금 더 지켜낼 수 있기를.

눈을 뜨자 고수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깊은 숨을 내쉬더니 조용히 말했다.

“너, 꼭 행복해져라. 지금은 많이 힘들겠지만… 언젠가 웃을 날이 올 거다. 진심으로 빌어요.”

그녀는 다시 울컥했다. 스스로조차 믿지 못했던 ‘행복’이라는 단어가 고수의 입에서 나오자 비로소 가능해 보였다.

낡은 포차, 작은 케이크, 그리고 처음으로 누군가가 건네준 진심.

그날, 그녀는 오랜만에 사람 대 사람으로 존재하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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