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는 젊을 적 동네 훈남으로 통했다. 코트 자락만 휘날려도 사람들이 한 번쯤 돌아볼 만큼 눈에 띄었다. 키도 크고 이목구비도 반듯했다. 무엇보다 웃을 때 입가에 지어지는 깊은 미소가 여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아내 역시 마을에서 미인으로 이름난 여인이었다. 긴 생머리를 곱게 땋아 내리고, 하얀 저고리에 색동치마를 입으면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걸음걸이도 우아했고, 말씨도 단아했다.
둘은 선을 보고 만나 결혼했다. 첫눈에 반한 사랑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수는 처음 아내를 봤을 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대청마루에 단정히 앉아 있던 그녀의 모습,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볼이 발갛게 상기된 모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신혼 시절은 가난했지만 따뜻했다. 두 평짜리 셋방에서 시작한 신혼살림이었지만 아내는 불평 한 번 하지 않았다. 겨울밤 연탄불이 꺼져도 둘이 함께 있으면 춥지 않았다. 이불 한 장으로 몸을 맞대고 누워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녹였다.
정수가 장터에서 종이봉투에 군고구마를 사 들고 오면 아내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이런 걸 언제 사왔어요?" 하며 정수의 볼에 뽀뽀를 해주기도 했다. 호호 불며 반으로 쪼개 먹던 그 군고구마의 단맛은 두 사람의 청춘을 채워주었다.
아내는 정수의 셔츠를 다려주며 "오늘도 잘 다녀와요" 하고 배웅해주었고, 정수가 퇴근하면 "고생 많았어요" 하며 맞아주었다. 작은 밥상을 마주하고 앉아 하루 있었던 일들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정수는 얼굴값을 했다. 회사에서 승진하고 주변의 시선을 받으면서 점점 마음이 교만해졌다. 술집을 전전했고, 첩까지 두었다. 젊은 시절의 다정함은 온데간데없어졌다.
"당신은 왜 그러고 사는 거예요."
아내는 울며 지새우는 날이 많았다. 밤늦게 들어온 정수의 옷깃에서 다른 여자의 향수 냄새가 날 때마다 아내의 마음은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정수는 아내의 눈물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끄러워, 여자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울먹이는 아내에게 정수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담배 연기만 길게 내뿜었다. 때로는 손찌검을 하기도 했다. 아내는 볼을 맞고도 "죄송해요"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내의 가슴에는 원망이 쌓였다. 평생 원수 같은 남편, 그러나 아이들 때문에 버텨야 하는 삶. 이혼을 생각해봤지만 당시만 해도 여자 혼자서 아이를 키우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다. 아내는 점점 말이 없어졌고, 미소도 사라졌다. 한때 마을의 미인이었던 여인은 어느새 초췌한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정수는 그런 아내를 보며 "늙었네" 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장성해 떠나고, 노년이 되어 정수와 아내만 남았다. 정수도 이제 회사에서 은퇴했고, 첩도 오래전에 떠나버렸다. 집에는 늙은 부부만 남았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아내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당신은 누구세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정수는 농담인 줄 알았다. "뭐라고? 내가 누구냐고?" 하고 웃었다. 하지만 아내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정수요. 당신 남편이오."
정수는 그 말이 들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병원에 가보니 치매 초기 증상이라고 했다. 의사는 담담하게 설명했지만, 정수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이제 정수의 하루는 아내를 돌보는 일이었다. 약을 챙기고, 밥을 먹이고, 옷을 갈아입혔다. 마치 아이를 돌보듯. 처음에는 서툴렀다. 평생 집안일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던 그였는데, 이제는 빨래부터 청소까지 다 해야 했다.
아내는 때로 집을 나서려고 했다. "우리 집에 가야 해요" 하며 문을 열려고 했다. 정수는 그런 아내를 달래가며 붙들어야 했다. "여기가 우리 집이오" 하고 설명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이게 내 죄값이지."
젊었을 때 아내를 울린 것, 바람을 피운 것, 손찌검을 한 것. 모든 게 돌고 돌아 자신에게 돌아온 것만 같았다.
어느 겨울밤, 정수는 부엌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갈증이 심해 큰 컵으로 두 잔을 연달아 마셨다. 그때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목소리를 들었다.
아내가 딸과 통화하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들리는 말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정희야, 나 치매 아니야. 그냥 치매인 척한 거야."
정수의 손에서 컵이 덜컥 미끄러질 뻔했다. 꿈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말이었다. 그는 숨을 죽이고 계속 들었다.
아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 아버지 아직도 늙은 주제에 식당 여자들한테 추근대더라. 김 사장네 식당 가서 밥 먹을 때마다 젊은 여자한테 눈짓하고, '아줌마 예쁘네' 이런 소리하고. 보면서 속이 뒤집혔어. 평생 바람으로 고생시켜 놓고, 늙어서도 그 모양이더라.
그래서 내가 복수하려고 치매인 척한 거야. 처음엔 정말 속 시원했지. 그 사람이 허둥지둥하는 모습 보니까 말이야.
근데 말이다… 이제라도 약 챙겨주고 밥 떠먹여주더라. 평생 못 받은 걸 이제야 받는 거 있지. 어젯밤에는 이불까지 덮어주더라고. 그래서 그냥… 더 모른 척하기로 했어.
나도 마음은 풀리더라. 이 늙은 나이에 남편이 밥 떠먹여주고 하니까… 뭔가 서글프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렇더라."
정수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분노, 수치, 억울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내가… 이 꼴로까지 당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더는 집에 있을 수 없었다.
정수는 곧장 집을 나와 골목길을 걸었다. 겨울밤 공기가 매서웠지만, 분노로 달아오른 몸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술 생각이 더 간절했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포차, '고수포차'로 발길이 향했다. 천막을 걷고 들어서자 따뜻한 김과 술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몇 명의 손님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정수는 구석 자리에 앉아 소주를 주문했다. 잔이 오자마자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구멍이 화끈거렸지만 상관없었다. 잔이 몇 번이고 비워졌다.
"어서 오세요.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봐요?"
고수가 다가와 술을 채워주었다. 정수의 얼굴을 보더니, 물수건을 하나 가져다주었다.
"얼굴이 많이 상기되셨네요. 천천히 드세요."
정수는 고수의 친절함에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몇 잔을 더 마신 후에야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고수 양반, 내가 오늘 큰일을 알았소. 아내가 치매가 아니었답니다. 복수하려고 치매인 척을 한 거지."
고수는 놀란 표정으로 정수를 바라봤다.
"3년 동안 매일 밥 떠먹이고 약 챙겨줬는데, 그게 다 거짓말이었소."
정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고수는 조용히 정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중간중간 술을 따라주며 물도 한 잔 가져다주었다.
"처음엔 속이 뒤집혔소. 근데 생각해보니 그 여자 말이 틀리지 않더군. 내가 평생 바람으로만 살았으니."
정수는 잔을 또 비우며 고개를 숙였다.
"젊었을 때 내가 얼마나 못된 남편이었는지 아시오? 밤늦게 들어와 아내를 때리기도 했고, 다른 여자랑 놀아나면서 뻔뻔하게 굴었소."
"그럼 부인께서 왜 치매인 척하신 걸까요?"
"복수지 뭐요. 근데 말이오, 그래도 그 여자가 결국엔 나를 인정한 거 같아. '이제라도 남편 노릇 한다'고 딸한테 말하더라고."
정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분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해. 내가 평생 못해준 걸이제야 하고 있는 거더라고."
고수는 잠시 잔을 닦다 말고, 정수를 바라보았다.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습니다. 원망도 오래되면 결국 사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흘러가더군요."
"부인께서 치매인 척한 건 복수도 있었겠지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을 거예요. 진짜 치매였다면 대화도 불가능했을 텐데 치매인 척한 거라면 여전히 손님을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정수는 고수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계속 해오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더 진심으로 돌봐드리시면 되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속은 기분이 어떻소?"
"솔직히 속상하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부인께서 그동안 얼마나 외로우셨을지 생각해보세요."
정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포차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고수 양반 말이 맞소. 내가 평생 그 여자를 얼마나 외롭게 했는지... 이상한 건 이 3년 동안 아내를 돌보면서 내가 달라진 것 같더라고. 그 여자가 밥을 잘 먹으면 기분이 좋고, 아프면 내 마음도 아프고."
"그게 바로 진짜 부부의 마음이겠지요."
정수는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일흔이 되어서야 사랑이 뭔지 알겠소. 그동안 내가 한 건 사랑이 아니라 그냥 소유욕이었어."
고수는 새로운 안주를 하나 내왔다.
"이건 서비스입니다. 손님이 진짜 사랑을 깨달으신 날이니까요."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정수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기억은 지워져도, 결국 남는 건 손이더군. 오늘도... 나는 그 손을 잡을 거요."
"맞습니다. 끝내 남는 건... 손을 놓지 않는 마음이지요."
"고수 양반은 어쩜 그런 말을 잘하시오?"
고수는 잠시 잔을 굴리다 고개를 들었다.
"저도 한때는 누군가의 손을 놓쳤던 적이 있거든요."
정수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갑을 꺼냈다.
"오늘은 제가 내겠습니다. 대신 집에 가서… 부인께 잘해드리세요."
"고마우이. 정말 고마워."
정수는 깊숙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천천히 포차 문을 나섰다.
천막을 밀자, 차가운 바람과 함께 흩날리는 눈발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오히려 가벼워져 있었다.
고수는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다 조용히 주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늘 그렇듯 그릇 닦기 세레모니를 시작했다.
마른행주로 그릇을 닦고, 또 닦았다.
그릇의 표면 위로 새벽빛이 얇게 내려앉았다.
고수는 그 빛을 천천히 확인하곤 불을 끄고, 천막을 내렸다.
밖의 눈발과 안의 빛이 섞이는 순간 포차는 고요 속에 잠겼다.
그렇게 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새벽에 묻혔다.
그리고 내일 밤, 다른 잔들이 다시 채워질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