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흐르는 마음

by 권성선

1928년생이신 외할머니는 큰 키와 고운 자태로 늘 눈에 띄는 분이셨다. 젊은 시절에는 지방 유지로서 단정한 한복 차림으로 외부 활동을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가세가 기울면서는 손수 산에 올라 산나물을 뜯어와 데쳐 말리고, 가을이면 도토리를 주워 묵을 쑤셨다. 세 들어 사는 이웃들의 민원까지도 도맡아 처리하며 묵묵히 집안을 지탱하셨다.

집 안에서는 늘 재봉틀이 달그락거렸다. 옷을 짓고, 커튼을 달고, 이불 호청을 하나하나 꿰매며 살림을 꾸리셨다. 재봉틀의 규칙적인 소리는 집안의 맥박 같았고, 그 손끝에서 나온 옷감은 우리 삶을 덮어주는 가장 따뜻한 껍질이 되었다.

말수가 많지 않았던 할머니는 무언가를 길게 설명하거나 다정한 말을 건네는 법이 없었다. 대신 바쁘게 움직이는 손으로 집안을 돌보셨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 모습이 조금 무섭기도 하고,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비 오는 날이면 할머니는 마당의 항아리 뚜껑을 일일이 덮으셨다. 마루에서 바라보던 그 풍경은 늘 쓸쓸하게 다가왔다. 마른 수건으로 항아리 뚜껑을 닦고 조심스레 덮는 손길. 말 대신 손끝으로 마음을 건네는 분. 그게 내 외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일할 때면 낮고 일정한 노래를 흥얼거리셨다. 정확하지 않은 음이었지만 그 흐름은 빗소리처럼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방 안에 앉아 있어도 나는 늘 할머니가 있는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쌀을 씻는 소리, 부엌을 닦는 물소리. 그런 소리 속에서 나는 알았다. 사랑은 꼭 말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밥을 반 공기 더 담아주는 마음, 국을 먼저 내어놓는 배려, 감기에 걸렸을 때 이마 위에 얹어주던 미지근한 수건. 말하지 않아도 사랑은 흐른다는 것을 나는 할머니에게 배웠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내 등을 쓸어내려 주시던 순간이 있다. 아무 말 없이,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주던 그날의 감촉. 나는 아직도 그 따뜻한 온기를 기억한다.

밤이면 우리는 방 안 가득 요를 펴고 나란히 누웠다. 작은 섬처럼 펼쳐진 이불 위에서, 숨소리가 점점 고요해질 때쯤이면 할머니는 아주 작은 소리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읊조리셨다. 그것은 기도 같기도 자장가 같기도 했다. 마치 내가 다치지 않고 살아가기를 아프지 않기를 축원하는 듯한 소리였다.

요강 뚜껑을 열고 닫는 소리, 그것을 비우러 나가던 새벽 공기의 냄새까지도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그 모든 것이 말은 없지만 사랑이 흐르던 풍경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늘 사랑 안에 있었다. 요를 같이 펴고 자는 것, 요강을 준비해주는 것, 밤마다 들려오는 작은 염불 소리. 어쩌면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 가는 다정함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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