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연휴, 외가 마당엔 장작 냄새와 따끈한 국물 향이 함께 피어올랐다. 부엌에서는 외할머니가 탕국 냄비를 저으셨고, 나는 방 안에서 전을 부쳤다.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전기후라이팬에 달걀물을 입힌 동그랑땡과 동태전을 올렸다. 기름 냄새가 바닥에 퍼질 때마다 동그랑땡은 노릇노릇해졌고, 동태전은 살짝 고소한 향을 냈다
엄마가 같은 내 동생은 전날 밤 이미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결혼한 엄마는 명절마다 남편의 집과 자신의 시댁을 오갔기 때문이다. 나는 끝까지 외가에 남았다. 언제나 그랬다. 서울에 사는 둘째 외삼촌 가족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외숙모는 정성껏 준비한 갈비 세트를 내밀었고, 사촌 동생들의 웃음소리가 마당을 가득 채웠다. 곧 마루는 온기로 가득해졌다. 나는 방 안에 남아 조용히 전을 뒤집었다. 기름이 튀어 손등에 닿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상은 두 개가 차려졌다. 남자들 상, 여자들 상. 모두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외가는 늘 손님들로 붐볐다. 할아버지는 한때 제재소도 하시고, 정류장도 운영하시고, 건물도 여러 채 소유하셨다. 도로를 놓는 데 돈을 보태기도 했고, 소방차를 사는 데 큰 기부를 하신 적도 있었다. 정류장을 운영할 때는 밤마다 들통 가득한 돈을 세느라 바쁠 정도였다고 한다. 그 시절엔 사람들이 신문지에 둘둘 싼 고기와 담배 한 보루를 들고 와 인사를 드리곤 했다. 하지만 가세가 기울자 그런 발걸음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나는 그때 이미 사람들의 못난 습성을 어렴풋이 감지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먼 이모부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이에 비해 성숙해 보이네.”
웃는 얼굴로 건넨 말이었지만, 나는 울고 싶어졌다. 어른스러워 보인다는 말은 아이에게서 ‘아이’라는 이름을 빼앗는 말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내 몫의 어린 마음을 온전히 꺼내 본 적이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네”라고 대답했다. 그 한마디로 내 명절은 조용히 끝났다.
연휴가 지나자 삼촌 가족은 다시 서울로 떠났다.
어린 시절, 그래서 나는 명절이 싫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가 방앗간에서 해오신 오꼬시는 늘 달콤한 위로였다. 안동식혜는 할머니의 손끝에서 왔지만 내 그릇에만 땅콩을 한 움큼 더 얹어 주시던 건 늘 할아버지였다. 그래서 그 식혜의 맵고 고소한 맛은 다른 어떤 추억보다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