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나의 데이터 목록을 지워줘” 아내가 죽기 전 남편에게 유언을 남긴다. 산후우울증으로 남편과 딸과 아들과도 관계 맺기에 실패한, 정신병원에 들어가기까지 한 여인이 자신의 기록을, 기억을 찾아올 수 있는 봉안함과도 같은 디지털 도서관의 목록을 지워달라고 한다.
어느 미래, 사람들의 뇌 속 시냅스와 전기신호들이 모두 기록되어 들여다보면 죽기 전의 그 사람과 만날 수도, 이야기할 수도 있는 시절이다.
관내분실은 무덤에서 관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옮겨놓은 행위와 비견되는 일이다.
결혼 후 아이에 구애 없이 살던 화자는 갑작스러운 임신에 혼란스럽다. 애증으로 관계가 끊어지다시피 했던 돌아가신 어머니가 궁금해진다
요즘은 디지털도서관이 있어 사자와 이야기를 할 수 있어 다행이다. 돌아가신 후 한 번도 찾지 않았던 디지털도서관에 와서 찾아본 엄마는 목록에서 사라져 있었다. 갑작스러운 민원으로 정황을 파악한 도서관에서 아버지가 목록을 삭제해 달라고 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야 궁금해진 엄마를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일까?
지문처럼 그녀를 특정할 수 있으면 그녀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살아있을 때조차 끊어지다시피 한 관계를 사후에 찾아본들 찾을 수 있을까?
며칠 전, 아내의 투정에 들었던 생각이 관계와 관심인데, 문득 겹쳐진다. 나는 아내에게 어떻게 대했던가, 시집와서 직장에서의 당찬 모습을 버리고 네 명의 아이를 기른다고 이십 년은 지나버린 그녀의 젊은 시절을..
‘김은하’라는 이름의 그녀는 산후우울증에 딸에게 감정을 투사했을 것이다. 그것을 받는 딸은 온 세상과 다름없이 큰 엄마의 그 감정을 고스란히 받고 결국엔 도로 튕겨내었을 것이다.
지워달라는 목록의 그녀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매몰되어 버린 시간들을 버리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괜스레 찡해진다.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문자를 보냈다. 즉시 전화가 왔다. 무슨 일 있냐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당신을 사랑한다고.
엄마와 마찬가지로 멀어져 버린 아버지를 찾아간다. 엄마가 누구였는지 아무리 찾아도 자료가 없다. 엄마의 유품은 그대로 다락에 있었다. 육아와 요리책들, 그리고 엄마가 좋아했던 책들. 어디에 내어놓아도 엄마를 특정할 수 없다.
다시 찾은 아버지에게 엄마는 어떤 사람인지 되물을 수밖에 없다.
그 찾아가는 과정이 절박하다. 생명을 품는 것은 그만큼이나 위대하다. 자신이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것까지 수용하게 한다.
베란다 밖 산책로엔 엄마와 아기가 지나간다. 신기한 것을 본 듯 꺄악 하는 아장아장 걷는 아기와 그 아이를 어르는 엄마가 내 눈을 잡아끈다.
마침내 아빠에게서 단서가 나왔다. 디지털화로 책이 없어질 무렵 책 표지 다자이너였던 김은하의 이름으로 된 책 표지들. 엄마의 책장에는 그녀가 디자인 한 책들이 꽂혀있었다. 그녀의 지문을 찾았다.
엄마를 찾은 지민이 엄마에게 말한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엄마를 이해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