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절로 들어가는 길 섶, 짙은 색으로 변한 풀과 나무 내음이 2시간 여 쉬지 않고 차를 몰아 희미해진 시야를 밝힌다.
초재에 오고서 시간 내어 중간에도 와야지 했는데, 맘처럼 하지는 못했다. 막재가 되어 그동안 틈틈이 금강경 사경한 것을 들고 통영에서 담양 용흥사까지 새벽길을 열고 왔다.
아내가 열 살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단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40여 년을 두 아들과 두 딸을 건사해 왔다.
남해에서 혼자 기거하던 치매에 걸린 노모를 매주 효성스러운 4 자식이 돌아가며 주말을 챙겼다. 마지막 남해를 떠날 때는 막내 사위인 내가 모셨다. 울산 우리 집 앞 요양병원 입원할 때 검진에서 나온 온 전신으로 퍼진 간암, 위암은 며칠 남지 않은 여생을 예고하는 듯했다. 잘 모이지 않던 4형제가 14일 동안 그래도 한 두 번 모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모두에게 모이라고 지령을 내리는 듯 그날 아침 맥이 크게 떨어졌다. 아침에 연락받은 서울, 부산 아들들은 내가 조퇴하고 점심때 가니 벌써 와 있었다. 울산에 있던 큰 딸도 3시가 되어 왔는데, 통영에 있던 막내는 퇴근하고서야 가까스로 도착했다. 낮동안의 회광반조로 아들과 큰딸은 봤다. 막내는 그저 식어가는 온기만이 남은 손을 잡으며 처량하고 거칠게 울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렇게라도 자식들 편하라고 남김 없는 사랑을 두고 갔다.
막재가 되어서야 다시 왔다는 미안함도, 맑은 하늘과 시원한 풍광이 있는 절에 도착하니 날려 보낸다.
“엄마, 오늘 날이 너무 좋아요. 엄마, 마지막 보는 날인데 날이 너무 좋아서 좋네요.”
아내가 넋두리를 내뱉는다.
남해 선원 마을 아내의 동네 친구인 이 절의 주지스님이 막재를 모시기로 했는데, 서울 조계사에 변고가 생겨 내려오지 못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일이 조금 꼬인다.
부산에서는 아주머니와 둘째 아들이, 서울에서는 형님이, 울산 큰 딸은 부부와 둘째 아들이, 통영 딸은 부부와 딸 셋이 모인다.
재가 진행되기 전이었다. 서울 오빠가 주차장에 왔는데, 어떻게 가냐고 카톡이 왔다. 아내가 주차장으로 내려가며 혼잣말을 한다.
“주차장에 왜 차가 없지?”
천도재는 11시에 시작하지만 그전에 관욕제, 사시예불까지 우리 가족만의 행사로 진행한다.
서울 형님이 없는 채로 행사가 이어졌다. 천도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형님이 재로 들어왔다.
천도재는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대웅전에서의 절차가 끝나고 영정과 종이에 글이 적힌 혼백을 장손들이 들고 스님을 따라 경내를 돌아 소지처에 왔다. 어머니의 옷가지 남은 것과 사경한 몇 권의 경전을 혼백과 함께 태운다.
그때, 서울 둘째가 말한다.
“영정도 같이 태우지 왜 들고 있나?”
영정은 부산에서 가져가려 큰집 둘째가 들고 있다.
“제사 지낼 때 위패 없이 영정만 있어도 되니, 가져가야죠.”
울산 큰 사위가 대꾸한다.
다들 그들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다. 재가 끝났다고 공양소에 가서 공양하라시며 스님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남은 과일과 떡을 하나씩 들고 공양간으로 이동하며 내가 형님에게 물었다.
“형님 어찌 늦어셨어요?”
“아.. 절 이름 찍으니까 고흥으로 안내하더라고 동생에게 카톡 해서 잘못 간 걸 알았지 뭐야! 허허.”
밥을 먹고 주지스님이 꼭 드시고 가랬다며 다원에서 커피를 한잔 대접받았다. 이런 대가족끼리는 처음일지 마지막일지 모르는 커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