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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결 Aug 27. 2023

가을은 풋밤으로부터 온다

힐링 에세이

여름의 끝자락, 짧아지는 해만큼 길어진 노을사이로 가을이 온다. 쌀쌀한 아침 공기를 녹이는 헤이즐넛 커피의 고소한 향기를 타고 가을이 온다. 잔잔한 음악의 흐름이 가슴을 건드리고 코스모스 활짝 핀 철길 사이로 부는 보드라운 바람같이 가을이 그렇게 소리없이 오고 있는 중이다.


초록의 무성함이 한 풀 꺾일 무렵이니 지금 쯤이면 고향마을 앞 산의 밤나무도 가시를 잔뜩 치켜세우고 가을 볕으로 속살을 익히고  껍질 안에서 살을 찌우며 세상 구경을 하기 위해 반들반들 윤이나도록 화장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렸을 때 고향마을의 앞 산은 밤나무 천지였다. 동네 개구쟁이 녀석들은 밤이 채 익기도 전에 기어코 맛을 보기 위해 작대기를 휘두르곤 했는데 익지도 않은 하얗고 말랑말랑한 껍질을 손톱이 벌어지도록 뜯어내고 떫은 맛 때문에 연신 '퉤퉤'  거리면서도 이빨로 긁어내는 수고를 마다 않고 속껍질을 벗겨내어 입에 넣는 촉촉한 풋밤의 맛을 음미하는 것으로 가을을 맞이했었다.


해마다 가을이 올 무렵이면 찾는 고향의 둘레길을 찾았었다. 그곳의 밤나무는 옛 시절을 회상하기에 충분하고 산책을 하면서 떨어진 밤송이에서 풋밤을 꺼내는 재미가 쏠쏠한 곳이다. 주로 길 가 떨어진 것을 줍지만 없으면 가지를 슬쩍 잡아 당겨 밤송이 하나를 따기도한다. 물론 작대기가 필요하다. 밤송이를 발로 밟아 가시를 밀쳐내며 아직 떠나지 않은 여름을 보내기라도 하듯 녹색 껍질을 가멸차게 헤집는다. 아직 덜 익은 상태라 까기가 쉽지 않다. '미끈덩' 실패하기를 몇 번, 어떨 땐 밤송이 전체가 바닥에서 멀리 튕겨나가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대부분 다소곳이 자리잡고 있는 풋밤을 볼 수있다. 조심조심 꺼내다 가시에 찔린다. 눈물이 찔끔, 굉장히 손가락에 전해오는 쓰라림이 꽤나 고통스럽다. 무언가 얻으려면 그만큼의 수고가 따르는 법,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 수확의 법칙을 배우는 순간이다.


주머니가 볼록해질 무렵, 이제 돌아오는 길에 까먹는 일만 남았다. 풋밤의 하얀 겉껍질은 쉽게 까진다. 다음은 속껍질이다. 밤 열매의 겉껍질과 밤알 사이의  내피를 긁어낸다. 율피라고 불리는 속껍질이 조금이라도 밤 알에 붙어 있으면 입 안에서 굴러다니는 텁텁함에 풋밤 고유의 신선한 맛이 사라지기에 한 점도 남기지 않고 제거하는데 그 공들임이 이만저만 아니다.


풋밤을 좋아하는 이유는 꼭 어린 시절의 기억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평온의 마음이 그 길에 있고 그 길에 밤나무가 있으며 돌돌돌 흐르다 내를 이루어 흐르는 물소리가 있고 밤새도록 컵에 꽃아 놓아도 시들지 않는 들꽃의 싱그러움이 잇으며  연인을 너무 사랑해서  따다주겠다고 맹세하던 그 하늘의 별이 떨어져 밤송이 안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밤을 깐다는 것은 알밤의 표면의 피부가 조금도 상하지 않도록 온전히 드러내는 집중의 과정이다. 이것을 상대의 입에 넣어주거나 하는 행위는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사랑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해마다 6월 즈음, 밤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 가지 끝에 갈래갈래  알싸하고 비릿한 향기를 매단 수꽃을  한껏 피워 꽃가루를 흩뿌린다. 그 때쯤이면 암꽃도 수줍게 피어나고 벌들이 사랑의 연서를 날개에 실어 수천 번을 퍼덕이며 수꽃과 암꽃사이를 바쁘게 날아다니면 수정이 일어나 사랑의 결실인 밤송이로 변신할 준비를 하는거다. 이 뜨거운 준비의 여름이 있었기에 가을이 더욱 풍요로워지듯 삶의 모든 과정은 결실을 거두기위한 의미있는 시간 들이 밤알처럼 들어있을 것이다


눈을 감고 어렸을 때의 둘레길을 싱상한다.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추억의 시간 위를 걷노라면 긴 장대를 둘러 맨 아빠 손을 잡고 밤을 따러 가던 꼬맹이가 지나가고 강산이 변한다는 만큼의 시간이 흘렀어도 늘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밤나무가 보인다. 가까이 한걸음 더 더가까이 다가가면 마치 언제왔냐고 인사라도 하듯 밤송이 하나를 툭 내어준다. 한 알갱이 까서 입 속에 쏘옥 넣는다. 순결하고 달콤한 그 옛날의 풋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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