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친은 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아예 못 드시는 분이다. 그 이유는 딱 하나, 몸에서 받지 않는다 는 것인데 어느 해 추석에 아버지와 친지 들을 따라 성묘를 하러 간적이 있었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음복할 차례가 되었는데 친척 어르신 들이 아버지께 계속 음복을 강권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손사레를 치며 거절했지만 거의 강제로 그것도 한 잔도 아니고 한 모금 정도를 마셨을 뿐인데 바로 쓰러지셨다. 당황한 친지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결국 119구급대를 불러 응급처치를 받고 겨우 일어나셨고 그 사건 이후로 아버지께 술을 권하는 친지는 없어졌다. 알콜을 분해하는 효소가 없는 사람이 음주에 취약하다던데 이쯤되면 효소 문제가 아니라 알코올 알레르기가 아닌 듯 싶을 정도다.
나 또한 유전의 영향인지 술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나마 아버지보다는 좀 나아서 맥주 한 두잔 정도는 마신다. 그러나 그것도 강제로 마시어야할 때 뿐 찾아서 마시진 않는다. 맥주라도 한 잔 목구멍으로 들어갈라치면 얼굴이 빨개지고 다음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온몸이 몸살난 듯 춥고 쑤신다. 게다가 눈알은 왜 이리 빠질 듯이 아프고 충혈되는지 그 고통은 나와 같은 처지의 체질
이라면 모를까 보통의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인사이동 후 회식이 있었는데 기관장이 폭탄주를 돌리는거다. 첫 회식자리인데 안마신다고하면 소위 찍히는 시절인지라 억지로 마신적이 있었는데 마시고 얼마 안있어 나도 모르게 정신을 잃은 듯하다. 눈을 떠보니 내가 길거리에 누워있는 것이다. 내게 술은 풍류도 아니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위로의 방편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바램일 뿐 나에게 술은 진짜 거부하고 싶은 치명적인 독이다.
또 한가지, 술을 싫어하는 이유가 있다면 나의 성향이 지나친 음주가 가져오는 이성의 상실을 극히 싫어한다는데 있다. 술마시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고 사람 들과의 교제를 통해 분위기가 부드러워지고 아울러 스트레스 해소가 된다고 하는데 내가 볼 땐 적당한 선이 있는 것이 좋아 보인다. 가벼운 자리든 진지한 자리든 정신줄을 놓지 않는 적당한 주도가 필요한데 지나치면 꼭 후유증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한번은 회식 날 어떤 직원이 술에 잔뜩 취해 2차를 쏘겠다고 큰 소리를 치더니 직원들을 고급 술집으로 데려가 진탕 마시고는 고액의 술값을 계산한다. 그리고 다음 날 언제 그랬냐는 듯 동행한 직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 '엔분의 일'이라고 우겨 각출하는 모습을 보고는 쓴 웃음이 나온 적이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꺼려지는 것이 있다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중 단연코 으뜸은 회식이다. 전체 회식, 부서별 회식, 직급별 회식, 팀 회식, 동호회 회식, 거기에 워크샵까지 나는 그 자리를 참 다양한 이름으로 포장된 술을 위한 모임 이라고 밖에는 생각하지 않는데 업무의 연장이라는 이상한 탈을 씌우고 강제로 참석하게 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회식이 예정되어 있는 날은 어떻게하면 중간에 도망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꼬박 자리를
지켜야한다. 분명 회식은 즐거운 대화 나눔의 자리가 되어야하는데 나를 비롯한 일부 동료들은 여전히 괴롭다.
그래서 회식 자리 술 피하기 스킬 몇가지를 고안해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일단, 눈에 잘 뜨이지 않고 화장실을 핑계로 쉽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 쪽 자리를 선점하는 것이다. 거기에 앞서 술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나 계속 건배를 외쳐대는 사람과 같은 테이블에 앉는 것을 피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둘째는 빈 물컵을 여러 개 준비해놓는 것이다. 술마시고 바로 물을 마시는 척하면서 빈컵에다가 입에 머금고 있는 술을 뱉는 방법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함정이 있으니 한 번은 목이 너무 말라 물인 줄 알고 쭈욱 들이켰다가 내가 마시는 척 하면서 뱉어놓은 소주를 한 번에 넘긴 적이 있었다. 곤욕스럽다. 그러나 위의 방법도 소용이 없을때가 있으니 모두 앞에서 폭탄주를 마시고 폭탄사를 해야할 때가 그 경우다. 모든 이가 지켜보고 있으니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마시기도 하는데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어떨 때는 슬쩍 밖으로 도망가 주변에서 어슬렁 거리며 술자리가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리곤 한다. 무척이나 힘든 상황인데 더 힘든 것은 그 상황이 겨울이라면 추워서 죽을 맛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의 아들,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는 정확히는 포도의 신이자 포도주의 신이고 다산과 풍요를 상징한다고한다. 또, 그는 기쁨의 신이자 광란과 황홀경의 신이기도 하며 도취와 쾌락의 신이기도 하다. 이렇게 술의 신의 이름이 상징하는 뜻이 다양한것은 술은 적당히 마시면 즐거울 수 있지만 지나치면 잔인해질뿐 아니라 이성을 잃고 광기에 빠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건전한 음주란 무엇일까. 자신의 주량을 알고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처음이며 상대에게 강권하지 않는 것이 두번 째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나의 입장에서보면 길거리를 지나다가 술에 취해 혀가 꼬이고 갈지자로 비틀거리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 저러고 싶을까 정도로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최근 들어 직장인 갑질 문제가 불거지면서 음주에 대한 강요는 분명 줄어들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지 않는 술자리로 고통받는 사람의 수는 여전히 많다. 삶에 지칠 때, 마음이 괴로울 때, 기쁠 때, 슬플 때 언제든 술은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문화에 뿌리깊게 작용하고 있는 음주에 대한 관대함과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은 개선되어야할 점이다. 마실 사람은 즐겁게 마시고 원하지 않는 사람은 편안히 대화를 즐길 수 있는 다양성과 스스로 적절히 제어하며 기분 좋게 즐길 수 있는 과유불급의 음주문화가 스스로의 건강을 지키고 타인에게 실수하지 않는 사랑과 존중의 자세다.
오늘 회식이다. 지금 우리 부서의 회식은 폭탄사도 없고 '술은 뭘로 할까'라는 말조차 없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마실 사람은 적당히 마시고 싫은 사람에게는 권유하지 않는다. 일이 있는 사람은 중간에 가도 되고 사정있는 사람은 빠져도 된다. 점심 먹고 차 한잔 마시는 티-타임 분위기다. 부담없는 회식, 비록 어떤 이는 재미없다 할지도 모르나 난 오늘의 이 모습이 좋다.
회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여직원 하나가 내게 말한다.
"이런 회식 너무 좋아요. 모여서 식사도 하고 2차,3차에 노래방까지 끌려다니지 않아 좋고 집에 일찍 가서 쉴 수도 있구요!"
"그래요? 이제 그런 세상은 아니죠. 나도 일찍 집에가서 운동도 하고 쉬는 시간을 갖고 싶어요"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위하여'를 외치고 잔을 부딪치며 비우자마자 채워야하는 자리를 잊고 동료와 함께 격식없이 소소한 행복과 마음의 풍요를 나누며 즐긴 오늘이야말로 모두가 행복한 '디오니소스' 된 날인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