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비(雨)
민병식
아침 일찍부터 비가 내린다. 아파드 베란다 창 밖으로 보이는 것이 온통 비 색깔이다. 밖으로 보이는 쌍둥이같은 아파트 건물이 칙칙한 껍질을 벗기 위해 씻고 있는 듯 샤워기 물줄기 같은 비를 맞고 있다. 투덕투덕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한 곳에 고정되어 지루하게만 보이는 일상의 색 위에 어두운 색을 덧칠하는 것같은 모습을 보며 출근 길을 나선다. 도로의 아스팔트 위로 빗방울이 싸늘하게 떨어지고, 바람에 나무 들이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린다. 우산 사이로 비는 자꾸 들이치고, 바지 끝은 고여있는 물에 끌려 찝찝한 기분이다.
올 여름은 비가 진짜 많이도 왔는데 가을이 오는 길목, 무엇이 그리도 아쉬운건지 또 비가 내린다. 아침부터 이곳 저 곳을 건드리면서 축축한 기분을 주변에 질퍽하게 흩뿌리니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와 갈 생각을 않고 하루종일 내 집에 죽치는 기분, 오늘처럼 비가 꼬릿꼬릿하게 내리는 날은 어쩌지 못하는 꿉꿉함의 기분을 떨치지 못한다.
찔꺽 거리는 걸음으로 자동차 경적소리와 어우러진 나뭇잎 들과 몰아치는 비바람의 장단에 박자를 맞추어 술에 취해 비틀거리듯 나도 함께 춤을 춘다. 버스를 탄다. 시원함을 넘어서 차갑게 느껴지는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다시 비 세상과 마주 앉았다. 빗방울 떨어지는 광경이 짚으로 꼬아만든 새끼줄처럼 주렁주렁 매달리고 있다.
잔잔한 팝송이 흐른다. 여름에는 쨍쨍 내리쬐는 햇살과 그에 맞는 바다 노래가 제격이겠지만 비가 가져다 주는 가을의 풍경을 가져다주는 노래도 나름 괜찮다. 오도독 오도독 차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러고 보니 안에서 바라보는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밖의 모습은 구경거리가 참 많다. 불어오는 바람에 우산이 꺾여 어쩔 줄 몰라하는 여학생, 아무 생각없이 비를 맞으며 홀딱 젖는 것도 불사하고 담담하게 걷는 청년, 편의점 앞 넘어진 입간판과 바람의 힘을 이기지 못해 바둥거리는 플라스틱 의자도 모두 이 세상을 살아가는 구성요소들이다. 나도 그들과 함께 비 세상의 테두리 안에 있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역할 수 없는 저 거대한 힘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그 어떤 누구도 하나의 점 같은 존재라는 일깨움을 준다. 비는 태양과 동시에 생명을 키우는 조력자이면서도 일순간에 이루어 놓은것을 앗아기기도 하는 약탈자 이기도 하다. 그런면에서 비가 주는 가장 큰 교훈은 아마도 겸손일
것이다. 아무리 잘나고 힘있는 사람이라도 발을 묶어 집 안에 가두어 둘 수 있고 , 뜨거운 태양의 심술이 계속되어 생명이 메말라 죽어갈 때 비는 그들의 목을 축여 꺼져가는 목숨을 살리기도 한다. 때로는 기쁨을 주기도 하고 원망과 슬픔을 주기도하는 비, 그러나 결국 쏟아진 비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커다란 강에서 만나 바다로 흘러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들에게 주어진 것에 순응하고 자신을 낮추며 화합하며 살아야함을 가르쳐 준다. 비 앞에서 무기력한 아침, 맑은 햇빛과 솜사탕같은 온화한 가을 하늘을 바라지만 쉽게 주어지지 않는 날씨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살이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그냥 지나쳐버리면 될 듯도 한데 스스로 짜증을 이겨
내지 못한 시간이 무용하다. 오후가 되어서야 마음의 포근함을 되찾았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지만 빗소리가 운치있게 리듬을 타고 스스로
에게 말을 건다
'하루하루가 매일 틀리듯이 기분도 똑같을 수는 없는거잖아, 늘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며 흔들리지 않고 하루를 지냈으면 하지만 어디 말처럼 쉬운가."
마음이 나를 위로해 준다. 그렇다. 일상은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한거다. 괜시리 울적한 날도 있는 거고 아무 이유없이 기분시 좋은 날도 있는 거다. 빗소리는 여전히 창문을 노크하고 그 소리에 박자를 맞추어 빗물받이가 장단을 맞추어 도르르 추임새를 넣는 시간,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이 시간이 감사하다.
그림 전체 문길동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