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전어(錢魚)의 시간
민병식
주말에 식사 약속이 있어 외출을 했다. 약속 장소는 식당이 즐비한 먹자골목이다. 골목을 지나노라니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고기 굽는 냄새는 아닌 듯 하고 감칠 맛 나는 냄새가 식욕을 자극하는 것이 저절로 냄새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냄새의 진원지를 찾고 보니 어느 횟 집 앞에서 요리사 한 분이 연탄불에 석쇠를 올려놓고 전어를 구우면서 부채질을 살살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냄새가 식당가를 참을 수 없는 유혹으로 가득 채우니 기막힌 상술에 혀를 내두르면서 결국은 친구를 만나 그 횟집에 들어섰다.
가을 전어는 제철 음식이다. 봄이든 가을이든 계절을 상징하는 제철 음식은 건강과 풍미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가져다 주는데 뼈까지 오도독 씹히는 전어 회와 집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위대한 전설을 갖고 있는 전어구이를 앞에 두니 산해진미가 따로 없다. 전어는 9월과 10월에 살이 통통 오르고 기름기가 좔좔 흘러서 먹기에 가장 좋은 철이다. 11월이 되면 전어의 뼈가 억세져서 씹기도 불편하고 맛도 떨어지니 지금이 가을 전어의 최고 정점의 맛을 찍는다고 하겠다.
참기름으로 버무린 쌈장에 깻잎에 싸서 먹으면 전어 특유의 풍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고, 채를 썰어서 쳐서 깻잎과 쪽파, 양파, 오이 등의 야채를 넣고 매콤한 칼로 다다닥 다진 청양고추와 홍고추를 가미하고 초고추장으로 쓱 버무린 후 깨소금과 참기름으로 살짝 마무리하는 전어회무침은 가을의 한 철만 맛볼 수 있는 천하 제일미이다. 또한, 전어를 굽느라 피어 오르는 연기를 맡으며 고소한 냄새에 침을 꼴깍 거리다가 왕소금을 철철 뿌려가며 노릇노릇 구운 후, 석쇠에서 바로 꺼내 꼬리를 잡고 양념장에 콕 찍어 와작와작 씹어 먹는 구이의 맛은 임금님의 수랏상도 부럽지 않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편안한 계절에 제철이라 불리는 전어를 먹으니 고소한 맛이 친구와의 대화와 어우러져 배가 되고 신나는 자리가 된다. 이다.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친구와의 옛 이야기로 마음을 채운다. 사실 오늘의 음식이 꼭 전어일 필요는 없었다. 삼겹살도 있고 곱창도 있고 쌀쌀한 날씨에 어울리는 뻐다귀 해장국도 좋다. 제철음식이 아니라도 맛난 음식은 얼마든지 많은데 중요한 것은 지금의 자리에 친구가 있고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음식과 함께 발달하였다. 날고기를 사냥해 먹다가 불을 알게 되고 음식을 익혀먹기 시작하고, 농경 법을 배우고 또 식량이 되는 곡식과 채소를 재배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더 서로 협력했을 것이고 더 많은 신뢰와 협동으로 노동의 결실은 계속 늘어났을 것이다. 바로 음식이 생존의 수단이며 인류를 화합하게하고 번성하게 해준 연결고리인 것이다.
오늘 저녁은 삼십년 지기 친구와 소주 한 잔에 쌀쌀한 가을 바람을 데우는 따뜻한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어떤 사심도 없이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자리다. 그것 자체만으로도 기분 좋은 시간이다. 행복은 별 것 아니다. 눈빛으로 마음을 주고 받고 고마워하는 것, 힘들고 고된 세상에서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바로 행복이 아닐까. 젊은 나이에 혼자 서울에 올라와 거의 무일푼으로 지내며 취업을 위해 그렇게 애를 쓰던 친구다. 친구에게는 아이가 있었다. 사랑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아이 엄마는 어려운 시간을 함께 견디어 내지 못하고 갈라섰고 친구는 결국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아이를 맡기고 취업을 위해 상경했다. 그러면서도 아이를 위해 하루 빨리 취업을 해야 한다며 눈물짓던 그 충혈 된 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를 놓아두고 발걸음을 떼는 그 서러움을 헤아릴 수 있을까. 우산으로도 막을 수 없는 장맛비처럼 떨어지는 서러움을 닦아주지 못하고 그저 잘 될 거라는 위로 한마디를 던지며 못내 미안해 함께 울었던 그 아픔의 시절을 품고 살았다.
하루에 한 끼 먹기도 힘들던 자기의 사정도 심각한데 그러면서도 내가 힘들 때는 발을 벗고 나서주고 도와주던 그 친구가 결국 취업에 성공하고 어려운 가정사와 주변 여건 등 모든 사정을 이해해주는 착한 사람를 만나 결혼까지 하는 것을 보면서 무한한 인생 감동의 스토리를 결국 보여주었다.
맛이 너무 좋아 사람들이 돈을 생각하지 않고 사들였다고 하여 돈 전(錢)자를 쓰는 전어를 먹으며 삶의 스승 같은 친구를 본다. 미래가 불안하던 20대의 젊은 날 만나 인연이 되어 곁에서 힘이 되어주던 수십 년 지기 친구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시간이다.
밖의 둥근 수족관 안에서 수십 마리의 전어가 뱅글 뱅글 돌고 있다. 좁은 공간에서 돌면서 서로 부딪힘이 없는 것도 참 희한하다. 무엇을 위해 저렇게 쉬지 않고 도는 걸까. 바다도 아닌 저 좁디좁은 공간에서 살려고 움직이는 필사의 몸짓, 나도 친구도 저렇게 살았다. 돌지 않으면 결국 가라앉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저 수족관을 탈출해 커다란 바다로 가고 싶은 마음을 이제 알 것 같다 우리의 삶도 전어와 다를 바 없는 버둥거리는 삶을 살았다. 그래도 최고의 맛으로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해주었듯이 지금 우리의 삶도 고소하고 맛나게 살 것이라고 다짐해보는 자리,
어느덧 꽃을 피우던 청춘은 지나고 마른 잎이 땅에 떨어지고 나무 그림자가 길게 몸을 눕히는 가을 날의 해질 녘처럼 서서히 노을 지는 중년의 나이에 열심히 살아온 지난 날을 회상하며 이제는 세월의 풍파와 맞서 싸우느라 꽉 쥐었던 주먹의 힘을 조금은 풀어도 괜찮지 않느냐고 너스레를 떨며 나는 지금 친구와 함께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나는 인생의 가을을 산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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