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애호박 두 개는 누가 따갔을까
민병식
가을 날씨 답지 않게 아침, 저녁으로 쌀쌀하더니 낮이 되자 햇살이 포근하다. 우리 사무실은 가끔 매식을 하기도 하지만 점심을 거의 도시락으로 해결한다. 코로나가 창궐할 무렵부터 도시락을 지참하기 시작했는데 거의 삼 년을 그리하다보니 비용도 절약되고 메뉴 고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편함까지 있으니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다.식사를 마치고 남는 시간에는 주변 거리를 산책 하곤 하는데 천천히 걸으며 담소도 나누고 중간에 짬이나면 차 한 잔을 하기도 하는데 실내에서 거의 앉아만 있는 우리들에겐 답답함을 해소하고 볕을 쪼이며 걷기 운동도 하는 귀중한 시간이다.
드디어 점심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나왔다. 온 몸을 감싸는 햇살의 포근함에 몸도 마음도 저절로 상쾌해지는 기분, 봄볕에는 며느리를 내보내고 가을볕에는 딸을 내보낸다는 속담처럼 햇살이 달콤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조차 온통 가을 향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즈음, 수도 없이 마주하는 차들의 쌩쌩거리는 소음과 메마른 시멘트 바닥의 갈라진 틈까지, 도시의 무용한 것들을 아무런 짜증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아주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평온한 세상이다.
산책 코스 중 늘 마주하는 학교 담벼락길을 도는데 왠일인지 노란 호박꽃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고 아주 조그많게 애호박 두 개가 열려있다. 아직 완전히 여물지는 않았고 칼로 자르면 한 세조각 정도 나올듯한데 우리는 담벼락 앞에서서 이곳에 어떻게 호박이 열렸을까를 이야기하며 자연의 신비로움에 감탄하며 한참을 멈춰서있다.
''이거 분명히 누군가가 따 갈꺼야. 내일이나 모레 쯤 없어져요. 인간 들은 욕심이 많아서 내버려 두질 않거든."
"설마요. 아직 다 크지도 않았는데 따갈려구요."
"진짜라니까. 이 삼일이면 없어진다니까. 내기할까요?"
오늘도 어김없이 식사 후 산책을 한다. 돌 하나, 풀 한 포기, 주변의 모든 것들이 가을을 닮아 걷기에 너무 행복한 날씨다. 며칠 전 호박 이야기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 담벼락 가까이 이르러 그 호박이 생각난다.
''아! 그 때 그 호박이 아직 있나 봅시다."
앗, 호박이 있던 자리가 휑하다.
"거봐요. 내가 분명히 누가 따갈거라고 했죠."
예상을 적중한 나는 으쓱하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그 작은 호박을 가져가서 무엇에 쓸까. 호박전을 부칠 양도 안되고 된장찌개에 넣어 봐야 여섯 조각 정도나 나올까. 아직 여물지도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먼저 따갈까봐 미리 손을 쓴 것같아 마음이 편칠 않다. 따갈만큼 자라도록 그냥 두었으면 안되는 거였을까. 꼭 내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이 가져가게 놓아두면 손해 보는 느낌이었을까. 그냥 두고 보아도 조금씩 커가는 모습에 그 길을 오가는 많은사람 들이 기특해 하고 좋아했을텐데 호박을 떼어낸 자리가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쓰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파트 입구에 있는 동네 마트에 들려 과일을 사는데 저만치 애호박이 있다. 애호박 값이 얼마일까. 크기와 가격으로 따져보니 없어진 애호박은 오백원어치도 안될 듯 싶다. 밖으로 나오니 날은 점점 저물고 기온이 쌀쌀해지고 있다. 문득 우리 들의 마음이 이 썰렁한 날씨를 데우는 가을햇살의 따스함과 하염없이 푸르기만한 높디 높은 가을 하늘의 이유없는 맑음을 닮아 갔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되는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