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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결 Nov 19. 2023

그리운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힐링 에세이

[에세이] 그리운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민병식


어렸을 때의 고향 마을은 눈이 참 많았다. 아침에 일어나 밖을 내다 보았을 때 함박 눈이 펑펑 내리면 동무들과 눈사람 만들 생각에 신이났고 눈싸움을 하며 하루 종일 눈 속에서 살았다. 고향 집의 장독대는 반 지하 창고 위쪽에 있어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는데 겨울양식이 차곡차곡 쟁여진 크고 작은 항아리들은 하얀 모자를 쓰고 옹기종기 모여 겨울을 나고 우리집 개 검둥이는 장독대 위로 올라가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눈이 온다고 짖어대곤 했다. 그 당니 우리집은 시멘트로 만든 양옥인 슬라브 집이었고 옥상이 있었다. 옥상 위에 올라가면 대문 앞 골목 하나 건너 국민학교 동창 여자아이가 사는 집의 뜰이 훤하게 보였고 여름 밤 새까만 밤하늘에서 눈에 띄게 반짝이는 별자리를 찾듯  눈으로 덮힌 온 마을의 움직임을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높았다.


눈이 펑펑 내리면 산토끼가 잘 뛰어다니지 못한다고 해서 산토끼를 잡겠다고 앞산을 올라 토끼굴 앞에 불을 지펴 연기를 피우고 매워서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고 강추위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어도 그때는 마냥 신나고 즐거웠다. 산에서 내려올 때쯤이면 모두 옷이 젖어 얼어붙은 탓에 생선짝 동태가 되었는데 벼를 모두 베어내 뿌리만 남은 딱딱해진 논에서 짚불을 피우고는 얼어붙은 손과 발을 녹이곤했다. 저녁이 되면 친구네 집 부억 아궁이에 모여 쌔빨갛게 타오르는 숯에 고구마와 감자를 묻어놓곤 내일은 얼음치기 수렵을 갈지, 썰매를 타러갈지 계획을 짜곤했는데 아주  노랗게 잘 익은 고구마 껍질을 벗겨 숯껌댕이를 입가에 묻혀가며 먹으면서 밤이 늦도록 이바구를 하곤 했다. 그야말로 어린 시절의 눈은 그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깨끗하고 순수했던 결정체 였으며 지금을 살고있는 내 마음의 정서적 토대가 되었고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은 가장 걱정없는 평안의 세계였다


서울 생활을 할 때 청소년기의 눈은 어땠을까.  어쩌면 눈이 세상에 둘도 없는 예쁜 여자친구를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는 설렘으로 다가와 눈 오는 날이면 친구들과 하릴없이 시내를 쏘다녔고 그 어울림이 좋았다. 눈 속에서 성탄절을 맞고 여자친구가 있는 또래 남자의 능력을 부러워하며 내년에는 꼭 여자친구가 있었으면 하고 시커먼 사내아이들끼리 성탄절 이브를 보내기도 했다. 대학시절의 눈은 낭만 그 자체였다. 나의 청춘은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 어떤 혹한 속에서도 따뜻했으며 푸르른 소나무 가지 위에 쌓인 눈처럼 아름다웠고 대나무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나가듯 꿈과 이상으로 뭉쳐 꽉꽉 다져진 눈뭉침 덩어리였다. 그렇다면 장년의 겨울은 어땠을까. 지금 돌이켜보면 아이들을 위해 존재했던 아빠로써의 역할에 충실한 성탄절 이브의 눈 아니었을까. 아이들과 눈사람을 만들며 동심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던, 눈내리던 성탄절 이브 아이들 방에 원하는 선물을 갖다 놓기 위해 요즘 산타는 굴뚝이 없어서 보일러 배관을 타고 창문으로 들어 온다는 거짓말을 스스럼 없이 하며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꺼라며 아이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며  트리에 붙이던 하얀 솜뭉치같은 볼 때마다 진짜 눈 같았던 좋은 아빠가 되기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던 눈이었음을 기억한다.


중년의 눈은 어떤가. 싸리눈이 함박눈으로 변하듯  한올 한올 생기던 흰머리가 어느새 뽑는 걸 포기할정도로 수북이 싸여가는 나이,  눈을 보아도 오면 오나부다하고 별 감흥이 없는, 연로하고 편찮으신 부모님이 쓰레기 분리배출이라도 하러 밖을 나가셨다가  혹시 넘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의 눈, 내일 아침까지 쌓이면 길이 얼텐데  대중교통을 이용해야하나 하고 출근 길을 미리 생각하는 눈이다. 하얀 눈의 순수함 뒤에 감추어진 눈이 녹았을 때의 진창과 질퍽거림을 이미 알아버린, 어쩌면 가슴 안의. 순수함들이 산전수전 다 겪은 세파에 찌들어 색이 바랜 마음일수도 있겠다.


점심시간이 다가올 무렵 올 해 첫눈이 내린다. 식사를 마치고 늘 하던 대로 직원 몇몇과 산책을 한다. 한송이 두 송이 떨어지던 눈이 갑자기 함박눈이 되어 쏟아지고 시야를 흐린다. 첫 눈이 온다고 좋아하는 후배 들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쏘면서 함께 추억 사진을 찍고 오랜만에 눈에 대한 즐거움을 느껴본다.


"내년에 첫 눈오면 오늘 내가 커피 산 거 잊지말아요, 사진으로 남겨서 오늘을 추억하자고."


지나고 보면 모든 시간이 그리움이다. 아마 내년 첫 눈 오는 날에 오늘을 산책했던 구성원 들이 함께 남아 있을지 모르겠으나 누구나의 가슴에 추억이 되어 오늘을 기억할 것이다. 지나간 것은  그리움을 남긴다.  눈 오는 날의 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지나간 오늘을 그리워 하기 위해 지금의 풍경을 수집하고 있다.

사진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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