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독일 출장길에 책 한 권을 읽는다. 날짜도 기억난다. 2016년 11월 17일.
일주일 남짓 되는 출장길에 알맞은 두께의 소설이었고, 밝은 군청색으로 책 표지 디자인도 설렌다. 이제 비행기에 앉아 맥주나 홀짝이며 읽기를 즐기기만 하면 될 일이다.
오랜만에 그 책을 다시 펼쳤다.
소설 마지막 페이지 뒷장의 메모 이외엔 어떠한 끄적임과 밑줄 그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작가가 글을 꾸역꾸역 쓰자고 쓴 것인가?
혹시나 페이지를 채우기 위해 작가가 작문의 고통을 느꼈다면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메모.
[프래니와 주이, 1961]는 출장 후 책장에 꽂혔다.
어느 날부터 계속 [호밀밭의 파수꾼, 1951]이 눈에 띈다.
인스타그램에도 올라오고 오랜만에 들른 알라딘 서점에서도 자꾸 민음사 책들 사이에서 눈에 들어온다. ‘언젠간 읽어야지 읽어야지’하는 마음을 갖는다.
작가 이름이 이상하게 친숙하다. 워낙 유명한 소설의 작가이려니 했지만 그 이상이다.
[프래니와 주이]와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는 같은 사람이었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예전 책의 주인공 ‘주이’도 연신 담배를 피워 댔다.
주인공이자 문제아인 홀든 콜필드도 연신 담배를 피워 댄다.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크리스마스 연휴를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며칠을 참지 못하고 기숙사를 뛰쳐나온 날부터 매일 담배 3갑씩은 피웠을 것이다.
동생 피비와 함께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 사흘 동안 낯선 뉴욕의 뒷골목을 떠돌며 겪는 10대의 정신적 방황에 대한 소설이다.
어찌 그리 싫은 것도 그렇게 많은지! 좋은 것은 가끔 있다. 아주 가끔.
책을 읽다 보면 홀든의 ‘싫다’는 이야기가 반이고, 나머지는 ‘정말 싫다’는 이야기가 반일 것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싫고 그냥 좋을 뿐이다.
현실과 생각 간의 괴리로 힘든 고등학생이라서 이해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고등학교 퇴학이 네 번째라니. 내가 보기엔 대책이 없는 아이다.
읽다 보니 자꾸만 주인공 부모님 마음으로 빙의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도 자기 동생 피비는 끔찍이 사랑하고 아낀다.
정말로 주인공이 되고 싶은 건 호밀밭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어 한다. 피비를 지켜주고 싶은 것이 아닐까?
홀든의 방황과 3일간의 모든 상황이 나에게 편하지 않다.
고뇌하며 성장통을 겪었던 [데미안]의 싱클레어와는 결이 다르다.
어찌 어른이 되는 과정이 한 가지만 있을까? 내 아들은 내 딸은 어떤 방식으로 어른이 될까?
‘내가 편한 방식으로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여러 가지 과정으로 어른이 되어가는구나!’라고 느끼게 해주는 소설이 아닌가 싶다.
[프래니와 주이]를 읽을 때부터 무언가 나와는 잘 맞지 않았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읽기는 수월했으나, 20세기 영미 100대 소설로 선정될 만큼 명작으로써 너무 큰 기대를 했던 것일까? 모두에게 명작이지만 나에겐 명작이 아닐 수도 있다.
독후감을 쓰면서 찾아보니 작가의 체험을 소재로 쓴 성장소설이라고 한다.
‘아! 본인의 이야기를 근간으로 썼구나!’
샐린저 씨에게 조금씩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