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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원 Nov 20. 2021

소설 공자 /독후감170

孔子

 공자의 용모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공자孔子(B.C.551~B.C.479)는 키가 9척 6촌(210센티미터)이어서 사람들은 모두 공자를 키다리라 불렀다. 사마천은 공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머리가 움푹 들어갔기 때문에 구(丘)라 하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눈두덩이 평평하고, 눈꼬리가 긴 눈과 광대뼈가 튀어나왔다.


 현재의 공자는 이렇게 평가된다.

공자는 기독교와 불교를 창시한 교주인 예수와 석가와는 달리 철학자이자 사상가였으며, 성인이라기보다는 철인이었다. 바로 이 점이 공자가 예수, 석가와 더불어 세계3대 성인으로 추앙받으면서도 공자가 창시한 유교가 종교나 신앙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후대의 양명학이나 성리학 같은 인문학으로 발전한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이 정도면 공자를 설명했다 할 수 있을까? 

공자는 어떤 인물일까?


노나라 사람 공자는 마침내 중도재中都宰란 벼슬로 그토록 오랫동안 꿈꿔왔던 정치에 뛰어들게 된다. 이때 공자의 나이 51세였다. 젊은 시절이었던 19세 때 ‘창고의 물건을 관리하는 위리委吏’의 낮은 벼슬에 있었고, 2년 후인 21세 때엔 ‘나라의 가축을 기르는 승전리乘田吏’의 벼슬에 있었던 것이 공자가 지금까지 했던 유일한 관직 생활이었다.

51세에 중도재가 된 이래 55세에 대사구大司寇로서 재상의 일을 겸직하는 5년 동안의 황금시대를 스스로 마감하고 노나라를 떠나 열국을 순회하는 고난 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그 뒤 다시 노나라로 돌아온 것은 기원전 484년, 공자의 나이 68세 때였으니, 공자는 실로 13년 동안이나 열국을 주유했다.


중도재란 벼슬을 하기 전 47세의 공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하고 신비스러운 대사건을 만든다. 노자老子를 만나기 위해 주나라로 떠났기 때문이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대충 헤아려보면 공자가 노자를 만나러 갈 무렵에는 노자가 공자보다 나이가 20~30세가 많았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 무렵 노자의 나이는 80세에 가까운 노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마천의 기록처럼 공자의 유가와 노자의 도가는 두 갈래의 ‘같지 않은 길’이다.

현실적인 유가 사상은 필연적으로 사회 참여를 통하여 지상에서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군자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초현실적인 도가사상은 필연적으로 자연 상태 속의 은둔생활을 통하여 신선이 되기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가 사상은 도가사상을 ‘현실도피’라고 비난하고 있으며, 도가사상은 유가 사상을 ‘지나친 세속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오히려 두 성인은 짧은 만남을 통해 극단적인 두 갈래 길로 나뉘게 된다.

공자는 세상 밖으로 더욱 나가게 되었으며, 노자는 더욱더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열국을 주유하는 동안 공자는 [논어]의 <자로 편>에 실린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고 위나라를 다시 떠나기로 결심한다. 

‘진실로 나를 써주는 사람이 있다면 일 년이면 그 나라를 바로 잡을 수가 있고, 3년이면 완전한 정치의 성과를 올릴 수가 있으련만 (苟有用我者 朞月而已可也 三年有成)’

 과연 공자의 정치철학은 무엇이었을까?

정치가는 자신이 통치술이 오직 국민을 위한 정도正道에 충실하면 그만인 것이다.

“군자는 자기가 모르는 일에는 입을 다물고 있는 법이다. 사물의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언어의 도리가 맞지 않는 법이다. 언어가 도리에 맞지 않으면 하는 바의 일을 성취하기 어렵다. 하는 일을 성취하지 못하면 예와 악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와 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을 죄과에 알맞게 줄 수가 없게 된다. 형벌이 죄과에 맞지 않으면 백성들은 손발을 안심하고 놓을 곳이 없게 된다. 그래서 군자란 행위가 있으면 반드시 이름이 있어야 하고, 말을 하였으면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래서 군자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명분이다. 명분이 바로 이름인 것이다.”

 공자가 자로에게 말하였던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必也正名乎).’라는 정치철학에서 비롯된 ‘정명주의(正名主義)’는 공자의 정치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철학이다.


 13년에 걸친 혹독한 여정의 결과로 공자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현실적 정치에는 결코 접목시킬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리고, 깨닫는다.

 정치적 이상을 통해 국가를 바로잡으려는 외부적 노력보다 학문적 사상을 개발하여 내적 자아를 완성하려는 노력이 훨씬 더 값어치가 있다는 사실을.

 고향으로 돌아온 공자가 73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6년간 더 이상 노나라의 정치에 뛰어들지 아니하고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였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자의 모든 어록을 집대성한 [논어]나 공자의 일생을 기록한 [사기]는 나에겐 너무나 요원했지만, 공자도 맹자도 노자도 장자도 모두가 우리네와 같은 사람으로 느껴지게 하는 소설이다. 그들도 똑같이 자신들의 주장을 옹호하고, 타인들의 주장을 비판한다.

 동시대의 공자와 노자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니 공자왈 맹자왈이니 노자, 장자의 무위 사상이니 도교니 하는 단어들이 너~~~무 요원하진 않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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