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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원 Nov 27. 2021

원미동 사람들 /독후감171

 

사람 사는 이야기가 그득하다.

한 동네에서 살고 있는 많은 등장인물을 외우는 방법은 그 동네에 직접 살아보는 방법이 제일 빠르겠지만 소설이니 그럴 순 없다. 등장인물의 삶들을 한 챕터 한 챕터 읽고 있으니 내가 원미동에 사는 듯하다. 누구 하나 녹록지 않은 삶은 없지만 원미동 주민들의 삶이 나를 위로한다. 우리는 사람이니까 사람 사는 이야기에 위로받고 흐뭇해한다.

 tvN‘응답하라 1988’의 동네 골목이 연상되는 소설이기도 하지만, 내가 어릴 적 살던 원서동이 회상되기도 했다. 이름이 비슷해서 만은 아닐 것이다. 그 시절 우리 부모님들은 이사를 자주 다니셨다. 내가 기억하는 옛 집들을 합하면 손가락 열 개가 금방 접힌다.




누구나 그러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들어올 때 그랬던 것처럼, 폭이 좁은 문을 빠져나오는 사이 장롱의 옆구리가 또 동전만큼 뜯겨나가고 말았다.’

영하 십 도를 넘는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에 만삭의 아내와 용달차 짐칸 뒤에 앉아 부천 원미동으로 이사를 가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다 이유가 있다.


 누구나 그러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것이 분명한 또 다른 오물들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그는 차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화장실도 딸리지 않고, 수도꼭지는 있으나 하수구도 없는 원미동의 지하 단칸방에 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다 이유가 있다.


 누구나 그러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전라도 말로 해서 너 참 싸가지없더라. 진짜 안 와버리대?”

 철길 옆 찐빵집 딸 은자에게 원미동 옆에 있는 나이트클럽으로 자신을 보러 오라는 25년 만에 걸려온 전화에 만나러 가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다 이유가 있다.


 소설 초반에 은혜네 집이 원미동으로 이사를 가는 광경을 보며 바닥이라 생각했다.

바닥일 것 같았지만 바닥은 아니었다. 원미동 다른 삶들을 읽으니 바닥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이 삶이고 생활이었다. 잠깐 서글플 순 있겠으나 슬픈 것은 아니다.

 그냥 작가 양귀자 씨에게 조명받아한 챕터의 주인공이 되어 원미동 이웃에게 독자에게 삶이 드러나는 순간 조금 서글퍼지는 것뿐이다. 조금 지나면 괜찮다. 다시 다음 챕터를 읽으면 더한 삶이 기다린다. 하지만 괜찮다. 모두들 그러고 사니까. 그러며 만날 땐 웃고, 뒤에선 흉보며, 수다 떨며 사니까.




 살아가는 일이 이리도 고달프다는 이야기를 읽는데 나는 왜 거꾸로 힘이 나며 위로받을까?

‘나는 아니니까 괜찮다’ 혹은 ‘나는 저 정도는 아니지’라는 안도의 마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무언가 교차하고 있다. ‘슬픔과 희망’이라고 표현한다면 무언가 부족할 듯 하지만 그에 유사한 감정과 현실들이 교차한다. 아마도 포기하지 않아서 일지 싶다. 원미동 사람들은 사는 것이 힘들지만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다.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으며 살던지 꾸역꾸역 살던지 매일매일 하루를 살아간다. 한 동네 안에 세상 사람 모두가 들어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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