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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원 Jan 12. 2019

허삼관 매혈기/ 독후감19

위화 장편소설

 누군가 나에게 물어보면 좋겠다. 제일 좋아하는 중국 소설가가 누구냐고.

위화는 내가 쵝오로 좋아라 하는 중국 최고 소설가다.

그를 왜 그렇게 좋아하냐고 또 나에게 물었으면 좋겠다.

그는 내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일상에서 느껴온 것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요즘 시절 누구도 집안에 일이 생길 때마다 피를 팔아 문제를 해결하진 않지만 한 가족의 가장으로써 그럴 수 있을 것 같고,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그럴 수 있을 것 같고, 살다 보면 남자로서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이야기는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에서 시작한다. 가난이 생활이고, 생활이 가난 자체다.
피를 팔아야 할 정도로 찌들고 찌든 가난이다. 영화 [허삼관]에서 볼 수 있는 허삼관네 집을 보면 의외로 덜 가난하다고 느낄 만큼 책에서 묘사되는 가난은 심각하다. 반대급부로 가난에 대한 자세한 묘사 때문인지 책을 읽는 동안 비참함도 침울함도 느낄 수가 없다. 가난에 맞서는 그들만의 프로세스가 있다. 같은 환경을 겪는다면 우리도 모두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체계적이다.
 허삼관은 공장에서 매달 한 켤레의 장갑을 받는다. 한 켤레의 장갑으로 6년을 버틴다. 나머지 장갑들은 고스란히 모아두었다가 4켤레가 모이면 막내 삼락이, 6켤레가 모이면 둘째 이락이, 8 내지 9 켤레가 모이면 장갑의 실밥을 풀어 장남 일락이 옷을 한 벌씩 만들어 준다. 본인의 옷은  20켤레, 아내 허옥란의 옷은 장갑 17켤레가 필요하다.
 밥을 한 번 지을 때마다 한 줌의 쌀을 덜어내 침대 밑에 있는 독에 따로 부었다. ‘모두가 다 많이 먹으면 많이 먹는지도 모르고, 모두 적게 먹으면 아무도 적은 줄 몰라’ 매일 밥을 두 숟가락씩 적게 먹였다.
 
 사람 사는 것은 풍족한 지금이나 가난한 예전이나 똑같다. 위화는 모두 평등하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난다.  없는 와중에도 사건 사고는 터지기 마련이다.  허삼관은 일락이가 대장장이 방씨 아들의 골통을 깨뜨리고 왔을 때도, 임분방과 바람을 피우고 왔을 때도, 가뭄이 심해져 가족이 57일 동안 옥수수죽만 먹을 때도, 일락이가 간염에 걸렸을 때도 피를 판다. 돈이 필요해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병원에 가서 피를 파는 방법밖에 없지만 ‘돼지 간볶음 한 접시 하고 황주 두 냥’의 보상으로 절박한 상황은 해결 가능한 상황으로 바뀐다.
 
 첫날밤을 하소용과 보냈다고 아내 허옥란을 그렇게 구박하고 뺨을 갈기던 허삼관이었다. 문화 대혁명 때 만인 비판 투쟁대회에 끌려간 허옥란에게 반찬을 밥 아래 숨겨 식사를 챙겨주는 남편도 허삼관이다.

그가 진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는 허삼관은 마음이 참으로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허삼관은 친아들이 아니라고 구박만 하는 일락이를 위해서 제일 많은 횟수의 피를 팔았고 목숨을 걸고 피를 팔았다. 그렇게 그의 사랑은 말과 행동이 다른 아버지의 사랑이다.
허삼관의 입은 일락이에게 쉴 새 없이 욕을 퍼부었다. “이 쪼그만 자식, 개 같은 자식, 밥통 같은 자식··········내세에는 죽어도 네 아비 노릇은 안 하련다.··········내세에는 내가 널 죽을 때까지 고생시킬 테니··········” 하면서 일락이를 업고 국수를 먹이기 위해 승리 반점으로 향한다.
 
 그런 착한 허삼관이 행복해하며 소설이 끝난다.  개인적으로 해피엔딩의 소설은 감사하다. 피를 팔아 살아왔지만 허삼관, 허옥란 그리고 세 아들 모두가 건강하고 잘 있어서 감사하다. 물질의 정도만 차이가 있을 뿐 지금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따뜻한 소설 한 편을 잘 읽었다.
역시 위화다. 
읽으면서 엉뚱하게 이런 생각도 자주 든다.

피는 팔지 않아도 돼지 간볶음 한 접시 하고 황주 두 냥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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