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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원 Jan 19. 2019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독후감20

지대넓얕

 

이해를 하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작가는 우리를 절로 끄덕이게 한다.

 옳고 그른 것을 떠나 관점을 가지고 내가 사는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중요하다. 
구글맵에서 나의 위치를 확인해야 동선이 파악되는 것처럼 유구한 인류 역사에서 내가 살고 있는 시대와 경제체제가 불과 20~3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음을 느낄 때 나의 판단이 최선은 되어도 최고는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관점부터 우리는 시작할 수 있다. 틀린 것은 고칠 수 있고 잘못된 방향은 수정할 수 있다.

만약 관점을 갖기가 힘들다면 적어도 이 책을 통해 ‘세상에 이런 관점들이 있구나’하고 배우는 것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이겠다.
 
 저자는 이야기한다. 쉽게 읽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단순하고 가벼운 내용은 아닐 거라고.
정말로 그렇다. 인문학의 골격을 제시하기 위한 이 책은 읽은 후에 다시금 한번 자기 나름의 이해를 바탕으로 독후감을 쓸 가치가 있다.
 
 역사의 근간은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무엇이 없어서 누군가에게 빌리게 되면 상응하는 무엇인가를 상대방에게 보상해 주어야 한다.

곡식이 없어 빌리게 되면 대신 노동력이라도 제공해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상대방은 내가 필요한 것을 빌려주는 동시에 나에게 무엇인가를 원하기 때문이다. 공짜는 없다.
 오랜 세월 계속 빌려주는 사람과 계속 빌리는 사람의 관계가 지속되면 계급이 형성된다.
고대사회에는 왕과 노예로 나뉘었다가 세분화되어 왕, 귀족, 평민 그리고 노예로 나뉜다.
중세사회에도 여전히 계급은 건재하다. 더욱 세분화되어 왕과 귀족 사이에는 영주와 성직자가 있다. 고대사회에서는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왕이 신이라고 우기는 것이 통했다면, 중세사회에서는 성직자가 보증해줌으로써 신이 인정한 왕이라고 지배를 정당화했다.
 물론 성의 주인이자 장원을 소유하고 있는 영주는 중세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계급이다. 왜? 빌려주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빌려주는 무엇인가는 ‘생산수단’과 ‘생산물’이다. 이것들을 빌려주고 권력을 얻는 것이다.
 근대의 ‘생산수단’과 ‘생산물’은 공장이다. 그래서 여전히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존재한다. 성직자는 필요 없었다. 부르주아의 권력은 이성으로부터 권력의 정당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을 대체할 이성이라 함은 진화설이나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만유인력과 같은 새로운 발견 그리고 사후세계의 부정을 예로 들 수 있다.


 세상에 100% 좋은 것만도 100% 나쁜 것만도 없다. 우리를 풍요롭게 해주는 공장이지만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범이다. 제1차 세계대전도 그렇고 제2차 세계대전의 주범은 공장이 만들어낸 공급과잉 때문이다.
공장을 세워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된 유럽의 국가들은 계속 공장을 돌려야 한다.

공장을 세워둘 수는 없는 일이다. 국내에서 아무리 팔아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공장이 있는 다른 나라에 팔 수도 없는 실정이다. 방법은 새로운 시장 개척뿐이다.
 시장을 개척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식민지를 만드는 일이다. 영국은 인도로 갔고, 스페인은 남미로 갔고, 프랑스는 아프리카로 가서 식민지를 만들었다. 산업화가 뒤쳐진 독일은 한 발짝 늦다.
 공장을 세우고 공급과잉이 닥쳤으나 개척해야 할 시장이 없는 것이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이미 식민지화했다. 그럼 남은 방법은 전쟁뿐이다.
 제1차 세계대전! 더구나 전쟁은 막대한 수요를 창출하여 일시적으로 공급과잉을 해소시켜준다.
 전쟁에서 패한 독일은 힘들다. 세계 경제대공황으로도 힘들고 이제는 전쟁배상금까지 물어야 하는 상황이다. 다시 전쟁을 해서 이기면 전쟁배상금을 물지 않아도 된다. 다시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다. 독일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세계적 금융과 사업으로 부유하다. 유대인들은 본래 그리스도교 문화권인 유럽에서 에수님을 죽인 범죄를 저지른 민족으로 여러 국가에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생산수단'인 영토를 차지할 수 없었다. 중세사회부터 가장 천시되던 상업과 대부업에 종사했는데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상업과 대부업은 무역과 금융업으로 변하고 유대인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었다.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전쟁을 일으킨다.
 지구 반대편의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이루면서 공급과잉을 겪게 되고 독일과 같이 1929년 세계 경제대공황으로 경제적 위기에 봉착한다. 공급과잉으로 새로운 시장이 필요하다.
식민지가 필요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렇게 읽다 보면 모든 일은 다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한 가지 매번 헷갈리는 점이 있다.

내가 ‘보수’인지 ‘진보’인지 모르겠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아 진보라고 한다면 나를 빨갱이로 모는 느낌이고 자유 한국당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니 보수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공산주의인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독재주의다.

그럼 공산주의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자본주의다.

이런 잘못 비친 개념들이 보수와 진보라는 단어와 합쳐져 사용되고 있다. 

진보와 보수의 관점 차이는 세상에 대한 관점 차이다. 보수는 현재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 현재는 어떤 체제인가?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는 무엇인가? 정부의 개입을 비판하고 시장의 자유를 중시하는 체제이다.

반대인 진보는 정부의 개입을 추구하는 입장으로 이를 표방하는 체제는 사회주의도 있고 공산주의도 있다.

사회주의는 시장을 부분적으로, 공산주의는 시장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오해가 생긴 것이 진보는 빨갱이라고 하는 것이다.


 보수는 대개 자본가와 기업을 대변한다. 보수는 시장의 자유를 추구하여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여 세금을 낮추고 규제를 최소화한다. 세금이 줄어들면 복지도 줄어든다.

진보는 대개 생산수단과 생산물을 갖지 못한 노동자를 대변한다. 진보는 정부가 세금을 높이고 규제를 강화함으로써 복지를 향상해주기 기대한다.

 세상은 각기 보수와 진보에 해당하는 단체들의 대립각으로 움직인다.

보수는 보수끼리 협력하고 진보는 진보끼리 협력한다. 이런 사회단체들로는 정당, 언론과 방송, 경제집단, 군 그리고 종교 등이 있다. 발생하는 사회문제들은 이런 사회단체들이 보수인지 진보인지 본질을 파악한 후 그들의 대립관계를 파악해야 나 자신이 판단할 수 있다. 이런 기준이 없다면 세상이 혼란스럽고 복잡하고 어려울 뿐이다. 


너무 단순화한 나머지 얕은 지식일 수 있겠으나 예전과 지금의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넓고 얕은 지식을 시작으로 우리는 지적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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