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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원 Dec 17. 2022

징비록 懲毖錄 /독후감224

좌의정 : 조선시대 정1품 재상으로서 ‘의정부’에 소속된 최고 관리. 오늘날 부총리급.

병조판서 : 군사 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병조의 우두머리 관직. 오늘날 국방부 장관

도체찰사 : 국가 비상시 왕명에 따라 1개 도(道) 또는 몇 개 도의 군정과 민정을 총괄

영의정 : 조선시대 의정부의 으뜸 벼슬. 밑에 좌의정과 우의정이 있다

(풍원) 부원군 : 조선시대 왕비의 친아버지나 정일품 공신에게 주던 작호(爵號)




임진왜란(1592~1598)을 겪으며 유성룡(1542~1607)이 거친 직책들이다.

딱 봐도 조선시대를 책임지는 최고 고위 관료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위치와 상황에서 남긴 기록이 [징비록懲毖錄]이다. 책을 통해 수백 년 후 우리에게 임진왜란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책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자주 등장한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후손들에게 경계가 될 것이라 생각해 상세히 적어 둔다.”


 어느 정도로 상세히 적었을까?

조선시대 경영진의 입장에서 최대한 상세히 적었다. 후세에 닥쳐올지도 모를 우환을 경계토록 하기 위한 집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잘못부터 조정 내의 분란, 나아가 임금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 등 임진왜란을 둘러싸고 발생한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쓸모 있는 군사가 하나도 없었다.

도성의 성첩은 모두 3만이었으나 지킬 인원은 겨우 7천에 불과했다. 그것도 모두 오합지졸뿐이었으니 그들의 머릿속에는 도망갈 마음밖에는 없었다.

 적이 상륙해 왔을 때 북쪽을 향해 밤낮으로 진군하는 왜적들을 맞아 제대로 싸워 본 장수는 하나도 없었다. 1592년 4월 13일, 왜적이 국경을 침범해 부산포가 함락되고, 4월 30일 새벽 선조는 평양을 향해 피란길을 떠난다. 그리고, 5월 3일 적이 한양에 들이닥친다. 불과 20여 일 만에 한양까지 왜군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막상 왜구가 쳐들어와 임진왜란이 시작된 마당에 유성룡은 어떤 후회를 했을까?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란 나라엔 온통 답답하고 참담한 상황뿐이었다. 군사도 없었고, 무기도 열악했고, 식량도 없었다. 1592년 6월 11일, 선조는 피란으로 도망간 평양에서마저 북쪽 영변을 향해 길을 떠난다. 당시 교통과 통신을 감안한다면 4월 13일에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두 달도 채 안 되어 평양성을 함락시킨 것은 조선군이 얼마나 허약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실례라 할 수 있다.

 가장 마음 아픈 것은 왕과 고위 관리들 모두가 조선을 지키기 위한 자주국방 보다 국가존망을 중국 명나라에 의지하고자 했던 마음가짐이다.


 전라 수군절도사 이순신이 거제도 앞바다에서 적을 크게 물리쳤다.

원래 왜적은 수군과 육군이 합세해 서쪽을 공략하려 했다. 그런데 거제 싸움에서 패함으로써 한 팔이 끊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니 평양성을 점령한 적도 지원군이 사라지게 되어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이순신 장군이 한 번 이긴 결과였다!! 그 뒤로도 이순신은 삼도의 수군을 거느리고 한산도에 머물면서 적의 교통로를 막았다.

 그 무렵, 각 도에서 수많은 의병이 일어나 왜적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실로 하늘의 도움이 아닐 수 없다!!


 평양에서 패해 도주할 때부터 독이 오른 적은 앙심을 품고 성에 불을 지르고 백성들을 마구 죽이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적의 칼을 피해 가까스로 살아난 이들은 흩어져 숨었으니 그 수가 1만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굶주리고 발가벗은 채 죽은 사람을 깔고 베고 하니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선조는 경복궁을 나간 후 1년 반이 지난 1593년 10월에 환도했으나 불타고 남은 것들만이 성안에 가득하고, 거기에 더해 전염병과 기근으로 죽은 자들이 길에 겹쳐 있으며, 동대문 밖에 쌓인 시체는 성의 높이에 맞먹을 정도였다. 그 냄새가 너무 더러워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 잡아먹어, 죽은 시신이 보이면 순식간에 가르고 베어 피와 살이 낭자했다.



 이렇게 마무리되는 임진왜란은 그래도 내가 접해 들었던 범위였다. 그러나!!

유성룡은 선조께 아뢰었다. “왕께서 반드시 자리를 사퇴하시려고 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까닭을 듣고 싶습니다.”

 중국 명나라에서는 선조를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자는 의견도 분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소식이 선조의 귀까지 들어갔으니 이 무렵부터 선조는 끊임없이 퇴위하겠다는 뜻을 표한다. 이 무렵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거의 매일 선조는 퇴위를 표하고 신하들은 만류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니 선조 또한 참으로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냈음을 알 수 있다.


 하나 더!

임진왜란은 조선뿐 아니라 명나라에도 커다란 부담이었다.

그 무렵 명나라는 훗날 후금을 거쳐 청나라로 성장하는 여진족. 이런 상황에서 조선에 10만 명이 넘는 군사를 파견하는 일은 큰 부담이었고, 결국 이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후금의 공격을 받아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그런 까닭에 명나라는 기회만 있으면 일본과 강화를 맺고 조선에서 철수하려 했다. 이러한 명나라의 움직임은 조선 조정으로서는 참으로 답답한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조선은 조선인이 지켜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조선을 통해 명으로 조공을 바치기 위한 통로를 만들기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고 하는 마음과 그 조공을 받는 명나라조차 여진족의 위협으로 조속히 조선에서 철수하고 싶은 속마음의 중간에서 내가 내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누구에게 의지해서 내 나라를 지켜야 하는 지켜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더욱더 다시 한번 가슴 아프다.

 잊지 말자 6.25가 아니라 잊지 말자 임진왜란이 아닐까 싶다!!


 마음속에 새기기 위해 한 단계 더 강도가 높은 팩트로 독후감을 마친다.

명나라 관리들 가운데 조선 문제로 골머리를 썩은 이들이 적지 않음을 안다. 오죽하면 조선을 몇 나라로 나눠 번국 (藩國, 오랑캐 나라), 즉 제후국으로 만든 후 분할 통치하도록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조선에 이어 대한민국에 사는 오늘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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