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존슨 씨의 동물농장에서 가장 존경받는 동물이자 살만큼 산(12)미들 화이트종 수퇘지인 메이저 영감의 연설에서 시작한다. 왜 우리는 행복이 무엇인지, 여가를 누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도통 모르고 살까? 왜 우리는 비참한 생활을 계속해야만 하나? 라는 질문에 이어 생산성 없는 인간에 대한 비난이 이어진다. 젖을 만들어 내거나 알도 낳지 못하는 존재이며, 쟁기를 끌 힘도 없고 토끼를 잡을 만큼 빨리 달리지도 못한다. 또한, 인간들은 때가 되면 우리들을 도살장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일장 연설의 끝은 반란이다.
모든 동물들은 평등하며 인간과 투쟁하면서 절대로 인간을 흉내 내지 않기로 명심하고, 인간을 정복한 후에라도 그들이 행하며 살아온 악습에 물들지 않기를 유념하면서.
메이저 영감의 반란의 불씨는 동물농장에서 가장 영리한 스노블, 나폴레옹 그리고 스퀼러, 세 마리 돼지에게로 연결되어 ‘동물 주의’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반란은 행운처럼 성취되었다. 동시에 독재로 가는 과정도 시작되었다. 마치 그들이 증오했던 인간사회처럼.
동물들을 보며 인간군상을 떠올렸을 것이고, 동물농장을 보면서 사람 사는 사회를 그렸을 것이다. 동물들의 불평은 인간을 향해있다. 인간의 불평은 또 다른 인간을 향해있다. 동물들은 인간을 몰아내 그들의 행복을 찾을 수 있지만, 인간은 누구를 몰아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인간은 인간을 몰아내야만 행복해지나? 나쁜 인간만을 골라 몰아내야 하나? 이런 그릇된 생각들이 잘못된 세계관이나 민족관을 생산한다.
이러한 맥락으로 조지 오웰은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를 비난할 수도 있고, 본인이 지양하는 사회주의 이념이 어떻게 변질되어가는지 역설적으로 소설을 통해 보여주면서 진정한 사회주의 재건을 희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은 신랄하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국민을 착취하는 독재정권은 우리도 겪은 바가 있지만, 지금 지구 곳곳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자본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사상들이 얼마나 쉽게 독재정권으로 변모해가는지 너무나 쉽고도 예리하게 보여준다.
이 무거운 이야기가 어찌 이리 흥미로울까?
독재정권을 쥐고 있는 자들의 꼬락서니를 어찌 이리도 재미있게 표현했을까?
이유는 단연코 등장 동물들의 디테일한 성격 묘사를 꼽고 싶다. 삽화 한 장 없는 소설이지만 농장 동물들이 눈에 선하다. 생김생김이나 외관보다 각자 성격에서 묻어 나오는 행동거지나 서로 만들어내는 상황들이 이 소설을 더욱 영원한 명작이자 고전으로 만드는 듯하다.
독재로 군림하는 돼지 나폴레옹은 험상궂고, 덩치가 크고 말솜씨보다는 추진력과 의지가 강하다. 대변인 역할을 하는 돼지 스퀼러는 작고, 통통하며 목소리가 날카롭고 말재주가 굉장히 뛰어나다. 노동력 착취를 당하며, 조금은 미련해 보이는 복서는 엄청난 덩치에 키가 1.8미터로 마차를 끄는 말이다. 나이가 많은 당나귀 벤저민은 남의 일에 관여하기 싫어하고, 매사에 부정적이며 냉랭하다.
그들의 행동은 각자의 성격을 너무나 명확하게 대변하고 있어서 책을 읽는 동안 고집이 강하고 남의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나면 속으로 ‘돼지 나폴레옹’ 같은 놈이라 하고, 요령 없이 일만 힘들게 하는 이를 보면 ‘복서같은 말’ 같다고 연상하곤 했다. 주변 사람을 모두 동물로 상상했을 정도다.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문득 슬펐다. 누가 돼지이고, 누가 인간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싸우면서 소설이 마무리되어 슬픈게 아니다. 그 놈들은 그 작자들은 그런 방식으로 또한 살아갈 것이다. 내가 한 가지 문득 슬픈 이유는 농장의 동물들이 너무나 쉬이 망각한다. 너무나 쉽게 기억을 잃어버린다. 반란 이전의 옛 시절도. 왜 인간들을 향해 투쟁했는지도. 반란을 왜 일으켰는지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린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항상 생각하지 않으면 흘러가는 대로 억울하게 무지하게 살아가게 되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조지 오웰은 이를 일깨워주기 위해 소설을 쓴 듯하다. [동물농장]은 그의 나이 42세에 발표한 소설이다. 47세에 단명(短命)한 그가 너무나 안타깝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