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는 두 개의 미스터리가 있다.
하나는 소설 제목, 다른 하나는 소설을 이루는 25개 장章의 소제목들이다.
작가는 왜 소설 제목을 [위풍당당]이라고 지었을까?
제목에 대한 미스터리는 나의 생각과 상상력으로 어찌어찌 메꿀 수 있겠으나, 목차에 있는 소제목들은 해당 장章의 글과 연결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전혀 연관이 없는 듯 선문답처럼 느껴진다. 보통의 제목들 보다 길기도 길다. 소제목들의 순서를 바꾸고 살을 붙여 한 편의 글로 지어야 할까?
위풍당당하게 살기가 힘들어 제목을 지었을까? 아니면, 위풍당당하게 살고 싶어서 이렇게 제목을 지었을까? 소설에선 누구 하나 위풍당당한 이는 없구나!
강江가의 인적人的이라곤 없는 봉래산 산골에 사람에 데이고 치인 사람들 몇몇이 모여 마을을 꾸리고 살아간다. 작가가 성석제인 만큼 주변과 자연에 대한 관찰과 묘사가 치밀하다.
봉래산의 새를 묘사한다. 곤줄박이를 설명하고, 동고비를 설명한다.
‘동고비 역시 잣 같은 열매를 보면 당장 먹기보다는 저장을 하는 습성이 있긴 한데 잣을 어디에 묻었는지 몰라서 잃어버릴 확률이 높다. 그 덕분에 이듬해나 그 이듬해 잣나무 어린 묘목이 여기저기서 자라기 시작한다. (생략)’
동고비는 자책할 것이다. 자신이 잣을 어디에 묻었는지 까먹어서 위풍당당할 일이 없다. 하지만, 이듬해 묘목이 나도록 잣나무를 심은 것이다. 자연을 위해 자신을 위해 후세를 위해 위풍당당할 만하다.
우리는 우리 생각의 틀로 바로 코앞의 이익으로만 판단해서 위풍당당해하기도 하고, 의기소침해하기도 한다. 누구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무엇이 의기소침한 것인지 무엇이 위풍당당한 것인지.
나는 사실 작가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
‘입담계의 아트이자 재담계의 클래식 절대고수 성석제가 ‘위풍당당’ 돌아왔다!’ 고 책 띠지紙에 쓰여 있다.
사실 그가 어디에 갔었는지, 그의 예전을 알 수 없어 나는 무어라 평할 수는 없지만 책을 펼치는 내내 재미있게 읽었다. 그는 철저하게 관심 갖고, 관찰하고, 공부했을 것이다.
[입담계의 아트]인 만큼 소설 배경은 강가의 산골이지만 소설 소재는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이 다양하다.
소재로 나오는 노래만 몇 개 기억해 보아도 오페라 아리아, 가곡, 소양강 처녀, 난 알아요 그리고, 전자오르간 음악 등등등. 자연이면 자연, 세속적인 명품이면 명품 모든 소재를 소화하면서 글의 주변부를 풀어간다.
[재담계의 클래식]인 만큼 등장인물들 모두가 우여곡절 이야기 한 보따리씩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한이 너무 많아서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반대로 말이 어눌해져 버린 사람들 같다.
봉래산골을 침입하는 조직 폭력배들의 상황과 마인드까지 놓치지 않고 글의 핵심부를 만들어간다.
등장인물들의 과거사를 통한 삶은 우리와 맞닿아 있는 삶이기도 하지만, 배경을 바꿔서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봉래산골에서도 여전히 삶의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준다.
사람은 서로 배려하고 의지하고 살아가야 한다.
이렇게 보니 조직 폭력배를 포함한 등장인물 모두가 외로운 사람들이다.
누구 하나 위풍당당한 이가 없는 듯하다. 그래서 거꾸로 책 제목을 [위풍당당]으로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정소희 씨의 능력을 설명하는 부분이 따스하고 좋다. 읽기에도 좋았다.
해당 장의 소제목도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마법의 빛에 둘러싸여’이다.
‘소희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상처 입고 병들고 시들어가는 생명을 되살려내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다. 죽어가던 화초는 그녀의 손이 닿으면 살아났다.’
봉래산골에 들어와서도 소희는 나무와 풀, 꽃 하고 숲을 가꾸며 영혼이 연결되었다고 이야기할 정도다. 이와 같은 사랑으로 상처 받은 새미를 안아준다.
“새미야, 이리 온. 어서 와, 어서. 나는 너를, 너희를 정말 정말 사랑한단다.” 새미가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소희의 품에 안긴다. (중략) 우리가 너희를 돌봐주겠노라고 소희의 손은 새미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한다. 새미는 눈물을 참지 못한다. 엉엉 소리 내어 운다. 어깨와 가슴을 들먹이며 눈물을 쏟는다.
다행히 소설을 이루는 25개 장章의 소제목들에 관한 미스터리의 실마리는 책의 끄트머리에 소제목의 출처를 옮겨 두었는데, 그것들 대부분은 잘 알려진 가곡과 서정적인 올드팝 들이다.
작가의 (나와 같이 궁금해하는 독자에 대한) 배려에 감사하다.